<<광고>>
¶글쓴이 : 정아재
-검문 당해도 문제 없었지만, 좌파 씹선비답게 검문자 관등성명 요구하고 검문사유 물어
-불온한 행색의 가방에는 순정만화잡지 <윙크>와 만화 캐릭터 그림이 있는 노트 한 권뿐
-코를 찌르는 최루탄 냄새, 신촌로타리는 전쟁터. 수천 명 전경과 학생 대치하고 격돌 중

신촌 로타리는 전쟁터였다. 수천 명 전경과 학생이 대치하고, 격돌의 흔적이 차도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다. 그 해 8월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현장에 가기 전날 이야기를 해 보자. 아마도 8월 12일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이유로 나는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로 향했다. 평소의 운동 코스였으니 그냥 일상적으로 간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학교 정문 앞에는 전경들이 꽤 많이 배치돼서 검문을 하고 있었다. 내 가방에 든 것이라고는 아마도 지갑과 만화책 하나, 빈 물병 두 개, 문구류 따위였으리라.
검문을 당해도 전혀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좌파 씹선비답게 나는 검문자의 관등성명을 요구하고 검문사유를 물었다. 그런데, 이 어리버리한 친구가 사유를 설명하지 못했고, 결국 내가 상급자를 불러올 것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불려온 선임 역시 답은 주지 못하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만 주장하며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지휘관이 오게 됐다.
사실 깽판을 쳐 놓은 상황이라 조금 쫄리기는 했지만 지휘관은 별다른 제지 없이 협조를 요청하며 사유를 설명했고, 합당한 조건을 갖춘 심문에는 또 내가 준법시민으로서 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결과는 무사통과였다.
학교에 간 나는 잠시 들린 단과대 건물 앞에 모인 학생회 열성 당원들을 봤다. 그들은 민족대회 동참을 학우들에게 요구하고 있었고, 나는 슬그머니 그들을 피해갔다. 그 때 이후로 몇 년 동안 보지 못할 동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 그 날이 지나고 디데이가 됐다. 8월 14일. 그 날 나는 연세대 후문 쪽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형네 집을 찾아갈 계획이었다. 이유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아마도 뭔가 받아올 게 있었는지, 아니면 형이 밥을 사주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한총련이 민족대회인지 뭔지를 한다는 소식과 경찰이 봉쇄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상황이 얼마나 격앙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원래 행사일은 다음 날인 15일이었으니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연세대에 진입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신촌역에서 내린 나는 연세대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으나, 버스는 출발하지 못했다. 서너 명의 전경이 차에 올랐고, 검문을 시작했다. 어제의 일을 기억한 나는 여기서 실랑이를 벌여봐야, 명령을 받을 뿐인 하급자들을 곤란하게 할 뿐이고, 버스에 지휘관이 오르지 않는 한 해결도 어렵기 때문에 시간만 지체된다는 생각에 순순히 응했다.
내 가방을 열어본 전경은 피식 웃고는 내게 가려는 사유를 묻고 답을 들은 후,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갔다가 일찍 나오라는 조언과 함께 나를 보내줬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 불온서적이라도 들고 있을 것 같은 마스크와 행색을 한 나의 가방에서 나온 것은 순정만화잡지인 <윙크> 한 권과 전국책의 일화 몇 개와 조악한 만화 캐릭터 그림이 있는 노트 한 권 뿐이었다. 그리고 봉쇄는 개뿔. 나는 유유히 연세대로 걸어갔다. 물론 버스는 진입하지 못해서 더운 날에 조금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후일 들어보니 당일 남녀 한 쌍이 데이트를 한다며 지나갈 경우 그냥 보내줬다고 한다. 그래서 한총련 주요 간부들의 진입을 돕기 위해 1, 2학년 여학생들을 동원했다는 썰도 있다.
연세대 정문까지 온 나는 굳이 진입을 시도할 필요가 없어 학교 담벼락을 끼고 후문 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가는 동안 아무 제지도 없었다. 형네 자취집에 갔더니 어떻게 왔느냐며 형과 형 친구가 나를 맞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 생각하면 이 부분도 누군가 퍼트린 거짓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학교 출입은 어려워 선량한 일반 학생들도 개구멍으로나마 다닐 수 있고, 학생회관은 농성 분위기로 식재료를 조달하는 모양이었다.
형네 자취방에 있는 동안 소음이 들리고 최류탄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고, 상황이 험악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형은 얼른 들어가라고 나를 보냈다. 이미 차량은 전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버스는 탈 수 없어 신촌역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렇게 오후 늦은 시간 나는 정문으로 가지 않고 형이 알려준 길로 크게 우회해서 신촌 로타리로 향했다.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하늘에서는 타는 냄새가 났다. 여름이라 아직 그렇게 어두워질 시간이 아니었는데, 하늘은 어두웠다. 코를 찌르는 타는 냄새만으로도 급박한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도착한 신촌 로타리는 이미 전쟁터였다. 수천 명은 되어 보이는 전경과 학생이 대치하고 있었고, 이미 몇 차례 격돌한 흔적이 로타리 차도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