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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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단과대학의 조작된 자보와 훼손된 소자보 경험 적어. 관심 보이는 일반 학우들이 있었다

-“네가 말한 게 다 사실이라고 치자, 그럼 총학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라”로 논쟁 마무리

-대자보의 틀린 내용 고쳐주는데 “저 새끼 잡아!” “저거 프락치라고!” 다음 학기에 휴학계

 

 

 

그날도 학생회관 앞 공터에서 학생회가 거리 시위를 나가기 전 출정식 같은 집회를 하고 있었다.

 

탄압당한 언론, 조작된 진실에 대한 분노가 쌓여가면서 날씨도 더워져만 갔다. 그렇게 찾아온 여름은 투쟁의 냄새가 진동했다. 학기 말 종강 시즌이었고,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총학이 주도하는 집회를 보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그래, 학생회관이었다. 넷에서만 혁명 전사일 뿐, 현실에서는 목소리를 내는 것에 실패해온 나는 현실에서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사실 당시 무슨 계획을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내면에 그런 행동을 할 동기가 생겼던 것 같다.

 

학생회관 라운지 앞에 내걸린 대형 의견 게시판을 보며 나는 다수의 일반 학우 앞에서 목소리를 낸다면 동조하지는 않아도 –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고교 때 인민 대중의 수준을 보고 이미 알았다 –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싶었다. 이런 사업들을 했던 것을 보면 한총련도 총학도 이반되는 일반 학우 민심에 대한 위기감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나는 단과대학에서 경험한 조작된 자보와 훼손된 소자보 이야기를 적었고, 과연 관심을 보이는 일반 학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감이라기보다는 의심이었다. 학생회 독재 시절이었던 당시만 해도 그런 이야기는 너무나 극적이었고, 그걸 안면 드러내고 쓰고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만한 일이었다.

 

결국 오프라인 버전 댓글 논쟁이 일었다. 내가 한 마디를 쓰면 의심을 표하는 댓글이 달렸고 반박을 하면, 대댓글이 달렸다. 상대 토론자들과 나는 댓글 쓰는 감각으로 쓰고 있었지만 – 그들도 딱 행색이 대충 PC 통신 할 법한 행색이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 아직 인터넷 댓글 논쟁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구경꾼이 늘어나는 것은 부담이었다. 그중 내가 쓴 소자보를 읽은 운동권 열성분자라도 있으면 곤란했다. 과 선배들도 지나가면 곤란했다. 게다가 학생회 활동도 하지 않지만 학생회에 우호적인 인민이 많았고, 아무래도 사진 인증이라도 할 수 없는 내 입장은 수세였다. 결국, 논쟁은 “네가 말한 게 다 사실이라고 치자, 그럼 총학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라”는 얘기로 마무리됐다. 사실 나도 논쟁이 길어지는 것도 부담이었고, 총학에 단도직입적으로 문제 제기해 본 적은 없었으니 그쯤에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총학에 직접 문제 제기’라는 화두는 결국 여름과 방학의 초입에서 내 인생의 큰 사건 하나를 겪게 했다.

 

의식적으로는 앞선 댓글 논쟁의 연장선에 있지만 사실 직후였는지 다른 날이었는지 기억은 분명하지 않다. 그 날도 학생회관 앞 공터에서 학생회가 집회를 하고 있었다. 거리 시위를 나가기 전 출정식 같은 것이었는데, 유심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부가 죽인 청년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고 노수석 씨 레퍼토리는 단골이었고, 그달 자신들의 손으로 식물인간을 만든 고 김인원 의경도 언급됐다.

 

나는 당시까지만 해도 비주류일 뿐 좌파였고, 정부나 군경에 대한 애정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다른 대학이지만 자기 조직원들이 직접 구타해 쓰러진 젊은이에 대해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꼴을 보자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진심이라기보다 당시 한총련의 위기에서 투쟁을 선동하기 위한 도구로 썼을 뿐이지만, 그건 더 나쁜 짓이다.

 

당장 선동하는 연사의 마이크를 빼앗고 싶은 마음에 집회 인원 가운데를 헤쳐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내가 걸어나가면서 나한테 집중되는 시선과 숫자에 압도당했다. 그래 봤자 세상 경험 일천한 고작 스무 살짜리 넷 투사였으니 그 정도 소심함은 이해하고 넘어가자.

 

그러나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내가 발길을 돌린 자리에는 단상으로 이용하는 건물 통로 양옆 기둥에는 선동 문구 가득한 대자보가 둘 보였다. 나는 조용히 자보에 사실관계가 틀린 내용을 고쳐주기 시작했다. 고 노 씨의 사인부터였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모른 채.

 

사인을 바로잡고 다음 내용을 고치려는데 성난 외침이 들렸다. “저 새끼 잡아!” 단상의 양 끝에 있던 사수대원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왔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나는 임시 단상의 뒤쪽인 건물 통로를 통해 가장 빠른 교통편이 있는 곳을 향해 뛰었다.

 

뒤에서는 “저거 프락치라고!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행히 일반 학우들은 외면했고, 뒤돌아볼 틈 없이 달린 나는 그 날 평생 처음으로 내 돈 주고 택시를 탔다. 당시 두 끼 식사비를 내고 택시를 탄 나는 가까운 전철역에 내려 한참을 돌아 집으로 갔다.

 

다음날부터 한동안 나는 학교를 갈 수 없었다. 다행히 종강은 했고. 다음 학기는 휴학계를 내놨다.

 

그 날 나를 쫓아왔던 사수대원들은 나의 기민한 대처에 감사하기 바란다. 다행히 내가 매일 수 km를 뛰어서 등교하던 시절이었기에 망정이지, 내가 잡혔다면 당신들은 제2의 유시민이 되어 옥살이하지 않았겠나. 아니, 오히려 훈장 탈 기회를 놓치게 한 것인가. 미안하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 했다. 내가 남 걱정할 처지인가. 붙잡혔다면 84년의 임신현·손형구·정용범·전기동, 89년의 설인종, 93년의 김춘도, 이듬해 6월의 이종권, 이석… 그 명단에 내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3 순수의 시대(2)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6 새로운 희망

어느 고첩 이야기#7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1 그들만의 리그

어느 고첩 이야기#12 ‘겉치레 민주주의’ 대학교수들

어느 고첩 이야기#13 인생은 실전

어느 고첩 이야기#14 어른의 세계

어느 고첩 이야기#15 아이의 세계

어느 고첩 이야기#16 진실은 침몰한다(1)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

어느 고첩 이야기#22 그 해 8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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