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글쓴이 : 노환규
-3.4kg 심부전 심한 VSD 환아. 공중보건의 3년 마치고, 대학병원 전임의로 참여했던 첫 수술
–피가 나오는 곳이 없었는데 소량의 피가 계속 고여. 아기 체중이 워낙 적어 무시할 수 없는 양
–의사는 눈덮인 크레바스 위를 걷는 직업. 크레바스에 빠진 동료들 구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

그 날 이후, 나는 의사란 눈덮인 크레바스 위를 걷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중보건의 3년을 마치고, 대학병원의 전임의(fellow)로 들어와 참여했던 첫 수술로 기억한다.
환아는 3.4kg 심부전이 심한 VSD(심실중격결손) 환아였다. 심부전이 심했어도 VSD는 치료가 간단한 심장병이다.
그래도 3년만에 들어가는 심장수술이라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제1조수로 참여한 수술은 잘 끝났다. 오랫만의 cannualation도 잘 되었고, 수술도 무난히 마쳤다.
교수님이 수술방을 떠난 후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뒷정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남은 일은 인공심폐순환을 위해 심장혈관 여러 곳에 박아놓았던 관(카테터)을 제거하고 가슴을 닫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다. 관을 하나씩 제거하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심장근육에 전극(epicardial lead)을 부착하여 피부로 빼내고, 그리고 가슴을 닫기 전 출혈이 되는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어디에서 피가 새는지 조금씩 피가 고였다. 아기가 워낙 작아 수술 필드도 아주 작았기에 출혈의 원인을 찾기가 어렵지도 않았는데, 분명 피가 나오는 곳이 없었는데 닫으려고 하면 소량의 피가 계속 고였다. 출혈 양은 한 번에 수 cc로 적었지만 아기의 체중이 워낙 적어서 상대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양이었다.
주의 깊게 수술 필드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diaphragm 아래 peritoneum 쪽에서 조금씩 woozing되어 피가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뱃속에서 피가 나올 리가 없는데… 생각하면서도 peritoneum을 열어보았다.
피가 왈칵 쏟아졌다.
급히 suction을 하고 들여다보니, liver capsuel이 찢어진 것이 보였고 그곳에서 출혈이 되고 있었다. 그곳은 수술과 무관한 곳인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뾰족한 epicardial lead를 흉벽을 뚫고 밖으로 내보낼 때 간이 다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epicardial lead는 심장의 왼쪽으로 빼내는 것이 원칙이고 그 원칙을 지켰지만, 심부전이 너무 심해 간이 크게 부어 왼쪽 흉벽 바로 밑까지 커져 있었던 것이다.
안그래도 bleeding이 잘 되는 liver capsular injury… 게다가 bypass를 위해 항응고주사를 맞았고(antidote를 다시 주사하지만 기능이 완전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된다), 또한 체외순환동안 이물질인 tube를 통과하면서 혈소판들이 깨어지기 때문에 피가 잘 멎지 않았다. 혈압은 60mmHg까지 떨어졌고, 쇼크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교수님이 다시 수술대로 들어오셔서 봉합을 시도했지만 더 크게 찢어질 뿐이었다. 마지막 방법은 각종 지혈제를 퍼붓고 기도하며 멎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대로 했다. 그리고 기도가 통했는지, 천만다행으로 지혈이 되었고 아기는 이후 순조롭게 회복되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의사라는 직업이 눈덮인 크레바스 위를 걷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그 아기가 사망했더라면, 나는 책임은 물론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흰가운을 입은 고결한 직업으로 보이지만, 언제 깊은 수렁으로 빠질지 모르는 직업이다.
지금 나는 깊은 수렁에 빠진 의사동료들을 보고 있다.
오진을 했다는 이유로 3명의 의사들이 27일째 구치소에 갇혀 있다.
그리고 같은 환자를 진료한 다른 의사들 역시 또 다른 크레바스에 빠져 있다. 그들도 수년간 이 사건으로 시달렸고, 지금도 구치소에 갇혀 있는 의사들 못지 않은 고통을 받고 있다.
고통 받는 그 의사에게 위 경험을 얘기해주었다.
의사의 길을 걷는 한 언제 크레바스에 빠질지 모르는 눈길을 걷는 것이 의사의 숙명이다.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이 크레바스에 빠진 동료들을 구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다. 선택이 아닌,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다. 그래야 눈덮인 길을 후배의사들이 계속 걸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