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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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내가 쓴 글이 자보를 통해 조작당하는 경험을 한 뒤 역으로 ‘자보’라는 매체 활용해보기로

-패닉 2집의  ‘Ma Ma’ 가사에 위트를 가미한 패러디로 학생 인민 대중에 접근하려는 시도

-모조리 찢긴 자보. 어떤 비판도 수용 못하는 운동권 학생회의 철옹성 같은 군부독재 향기

 

 

 

패닉 2집의 곡 중 ‘Ma Ma’의 가사를 패러디해 운동권 학생회를 한 번 까보자는 발상이었다.

 

당시는 아직 인터넷이 보편화돼 있지 않았고, 온라인 게시판을 통한 의견교환이 여론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던 시대였다. 오히려 오프라인의 매체들이 학내의 여론에 주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내가 쓴 글이 자보라는 매체를 통해 조작당하는 경험을 한 뒤로, 나는 역으로 그 ‘자보’라는 매체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사실 고등학교 때도 자보를 통한 투쟁을 지켜본 적이 있는 내게는 그렇게 하기 힘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직설적 비판이 물 먹은 상태라, 나는 조금 더 위트를 가미해 학생 인민 대중에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그 해 1월에 수없이 개사 놀이를 해본 패닉 2집의 곡 중 한 곡을 골라 패러디 가사를 통해 한 번 까보자는 발상이었다. 마침, 적절한 곡이 있었다. ‘Ma Ma’였다.

 

학생 인민대중 개개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앞장세우면서, 뭐만 하면 학우 팔아먹고, 결국 학생 인민대중에게는 돌아오는 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쳐야만 하는 학생 인민대중의 현실이 원곡의 가사 속의 화자와 부모 세대의 관계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정말 그대로. 주체, 대상, 구체적 상황만 조금 틀어주면 됐다.

 

이제 콘텐츠는 준비됐다. 남은 문제는 내 악필이었다. 나는 글씨를 원체 못 썼다. 그것도 크게 쓰는 것은 더더군다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혼자서 대자보를 여러 장 만들어 붙이는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자보를 만들기로 했다. 출력해서 뽑는다면 작성자의 신분도 드러나지 않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그렇게 나는 어느 날 저녁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소자보를 여러 장 만들어 학교가 어둠에 잠긴 시간, 캠퍼스 곳곳의 자보 게시판에 붙였다. 뭐, 별다른 효과는 없더라도 조작당한 나의 여론에 대한 약간의 항의와 보복이 이뤄지는 것 같아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 날 밤 잠들 때까지의 망상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당시 보통 7시 즈음에 등교했는데… 와! 모조리 찢겨 있었다. 처음에 학생회관과 도서관에서 찢겨진 것을 발견했을 때는 그냥 거기에 동조하지 않은 운동권이 분노해 찢어버린 것이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혹시나 싶어 각 단과대 자보 게시판을 돌아봤는데. 단 한 곳도 남기지 않고 다 훼손되어 있었다. 모두.

 

학교 측의 철거로 볼 수는 없었다. 학교의 인력과 도구라면 충분히 온전히 철거할 수도 있었지만 조야하게 뜯겨 있었다. 캠퍼스가 꽤나 컸기 때문에, 순간적인 충동으로 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곳에도 있다는 것을 일일이 확인하러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국, 누군가 발견한 이후 조직적으로 대응했거나,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직 그 글을 읽고 공감할 대다수의 일반 학우들이 등교하기도 전에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나는 망연자실 서 있었다. 그 어떤 비판도 수용하지 못하는 운동권 학생회 조직에서는 철옹성 같은 군부독재의 향기가 짙게 퍼져 나왔다.

 

물론,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위트를 가미했다는 건 중2병 충만한 스무 살짜리의 생각이었을 뿐이고, 학생 인민대중에게는 전혀 위트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나 학생 인민대중인 일반 학우가 아닌 운동권들에게는 차라리 그냥 직설적 비판이 수용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래 봤자 이십 대였던 운동권 선배들에게는 모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바로 그 행동이야말로 내가 쓴 가사가 진실임을 그 어떤 사건보다 분명하게 웅변해주고 있었다.

 

“한 번도 내 얘기에 귀담아 봤니

그냥 무시해 버렸지

한마디 더 하면 대든다

찍소리 못하게 만들어 버렸지.

아니라고? 사랑하는 우리 학우 ♡♡”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3 순수의 시대(2)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6 새로운 희망

어느 고첩 이야기#7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1 그들만의 리그

어느 고첩 이야기#12 ‘겉치레 민주주의’ 대학교수들

어느 고첩 이야기#13 인생은 실전

어느 고첩 이야기#14 어른의 세계

어느 고첩 이야기#15 아이의 세계

어느 고첩 이야기#16 진실은 침몰한다(1)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

어느 고첩 이야기#22 그 해 8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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