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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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젊은이들의 죽음으로 시작한 1996년의 봄은 내게 진실의 죽음, 혹은 침몰을 선언해준 시기

90년대 중반 운동권 위기감 느껴. ‘비권’ 개념 확산되고 총학의 일반학우 대표성에도 회의적

학생회의 폐쇄성, 전체주의적이고 강압적인 후배 접촉, 의제설정의 비민주성 등 제기했지만

 

 

 

대자보는 인터넷 이전 시대의 자유게시판이었다.

씁쓸한 젊은이들의 죽음으로 시작한 1996년의 봄은 내게 진실의 죽음, 혹은 침몰을 선언해준 시기였다. 단지 언론의 편향성과 한 젊은이의 죽음이 또래의 젊은이들에 의해 다뤄지는 방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과 학생회 선배들에 지쳐 적어도 혁명가로서는 웹상의 존재가 된 나였지만, 혼란한 시대의 분노에 휩쓸려 가끔 웹 밖으로 나의 글이 튀어나왔을 때마다 학내에서도 여론 조작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뭣 모르는 호사가들은 연대 사태를 운동권 몰락의 계기로 보지만, 사실 이미 87체제를 완성하고 그 이후 10년을 바라보는 90년대 중반에 들어선 운동권은 쇠퇴에 대한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연대 사태 이전에는 언론을 타지 못했고, 산발적이어서 하나의 용어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비권’의 개념은 이미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총련 총학이 학생 대중 인민, 혹은 당시 용어로 ‘일반학우’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해 학생회들은 일반 학우를 대상으로 한 계몽전과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여러 선전 중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내가 속한 단과대 학생회가 단과대 건물 화장실 문마다 종이를 붙여놓고 건의사항을 적도록 했다. 아직 인터넷을 하는 인간은 덕후나 전공자밖에 없던 시대의 자유게시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마 학우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는 비판에 맞서 ‘민주적으로 보이는 모양새를 내려는’ 이미지 정치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니 정부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이나 운동권 시절 그들이 유일하게 잘했던 일은 일관되게 ‘이미지 정치’인 셈이다.

 

그러나 순수했던 방구석 혁명가였던 나는 그런 이면을 보지 못하고,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학생회의 폐쇄적인 구조, 후배들에 대한 전체주의적이고 강압적인 방식, 의제설정의 비민주성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결과는? 아주 아름다운 앙망문과 찬가로 변조되어 있었다.

 

당시 단과대 학생회는 들어온 의견을 수합해 그 중 단순 건의를 제외한 의미 있는 글을 연속 대자보 형태로 공개했는데, 거기에 내 글이 뽑혀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정도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보아왔던 문화가 있어서 그냥 저들 중 한 명이라도 이 글을 읽고 생각을 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던지라, 조금의 기대는 품고 읽어보았다.

 

그러나 그 글은 발췌해서 학생회 측에서 새로 썼는데, 원문의 취지와 내용을 완전히 왜곡한 수준이었다. 문단과 문장의 순서는 뒤바뀌어서 논리구조가 달라졌고, 나는 학생회를 불신한 자신을 반성하고 나같이 우매한 일반 학우들이 동조할 수 있도록 학생회의 민주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회심자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표현도 상당히 미화되어 있었다. 마치 징병을 옹호하는 친일파 문장가가 썼다는 천황 폐하 만세 기고문 정도로.

 

일제식민 시대 자체를 근대화의 시각으로 달리 봐야 하고, 당시 이미 합병이 됐고 독립을 장담할 수 없는 시점에서 징병 선동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평가를 해야 한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이 일을 생각한다면 그 징병 선동들이 자의에 의해 쓰지 않았거나, 심지어는 본인의 문장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유족도 있고. 일본은 조선이 아니고 더 개화되어서 그랬을 리가 없다고? 사람 사는 데 다 거기서 거기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3 순수의 시대(2)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6 새로운 희망

어느 고첩 이야기#7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1 그들만의 리그

어느 고첩 이야기#12 ‘겉치레 민주주의’ 대학교수들

어느 고첩 이야기#13 인생은 실전

어느 고첩 이야기#14 어른의 세계

어느 고첩 이야기#15 아이의 세계

어느 고첩 이야기#16 진실은 침몰한다(1)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

어느 고첩 이야기#22 그 해 8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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