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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진실은 항상 거짓보다 강하다”는 괴벨스의 발언. 거짓말을 강변할 때 주로 쓰는 말
-백남기 가톨릭농민회 전부회장 사건과 노수석 학생의 사망사건이 불러오는 데자뷰
-‘죽은것’이 유일한 공인 사람을 유공자로 부르는 것은 ‘고맙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괴벨스는 “진실은 항상 거짓보다 강하다”는 말을 자주했다. 사진은 히틀러가 독일의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얼마 전까지 집회 현장에서 유행했던 노래 중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참 아름다운 제목이다. 특히 그 가사 중에 나는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가사를 좋아한다. 이 가사와 똑같은 말을 했던 역사적 인물이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진실은 항상 거짓보다 강하다(Die Wahrheit ist immer stärker als die Lüge)”는 말을 만들어 포스터로 배포하기까지 했다. 나치의 선동가이자 히틀러의 후임 총통 요제프 괴벨스. 그렇다, 그런 말은 거짓말을 강변할 때 쓰는 말이다.
내가 이 사실을 몸으로 처음 체험한 시기가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패닉 2집 사건으로 요란하게 시작한 나의 1996년은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의 시기였다. 나에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96년은 운동권 역사에서도 소용돌이의 시기였다.
1996년 새 학기는 고 노수석 씨의 사망으로 시작됐다. 3월 29일, 종묘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했던 연세대 2년생 노수석 학생이 사망했다. 해당 집회 자체도 반정부 투쟁의 성격이 있었지만, 그 사건은 그 해 상반기에 몰아친 한총련의 반정부 투쟁의 서막을 연 사건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많은 또래 젊은이들이 그 해 죽었으니 학생들의 감정이 고조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대다수가 탄압이 아닌 스스로 택한 혹은 조직이 강요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은 ‘열사’라는 이름에 가려졌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노수석 씨의 사망 사건은 사망 원인에 대한 논란을 낳았다. 운동권에서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전경들의 무기에 맞아서 죽었다’는 설을 전파했지만, 부검 결과는 외인사가 아닌 심근병증에 의한 급성 심장사였다. 열사를 만들어 선동해야 할 상황을 부검이 부정한 것이었다.
지금도 진실이 뭐였는지 나는 정확히는 모른다. 아니 병사였다고 하더라도 당일의 격렬한 시위가 원인이 되지 못할 이유도 없으므로 직접 사인이 그렇게 핵심적인 사안이었나 싶기도 하다. 결국 시위하는 도중에 부상을 입은 젊은 청춘이 스러져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끝끝내 부검을 저지한 최근의 고 백남기 가톨릭농민회 전 부회장 사건을 보면 그렇게 그 부분을 논란을 삼은 이유도 납득이 되기도 한다. 고 노수석 씨 사건이 고 백남기 전 부회장의 부검 거부 이유로도 언급되는 걸 보면 나만 두 가지 사건의 공통점을 느끼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 ‘혁명’의 열기 속에서 나는 한 발 물러나 관찰했었다. 고 강경대 씨 사건에서 보인 유족들의 태도 변화에 어린 나이에 충격을 받았던 나는 이런 류의 사건은 냉정하게 사실을 탐구하는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당시 학교 도서관에서 여러 신문의 보도를 비교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정확한 언론사 논조가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으로는 조선·동아와 한겨레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중앙일보는 부검 결과는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조금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것 같다. 그리 보면 JTBC가 출범하기 전에, 중앙일보가 한겨레와 협업을 시작하기 전에, 아니 ‘조·중·동’ 퇴출 운동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조·중·동’이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아직도 좌파였다고는 해도 이미 주류 좌파에 상당히 실망해온 나는 부검이 조작됐다는 운동권의 주장을 온전히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조작됐다고 주장하지 않아도 강경 진압이 노수석 씨의 심장사를 유발했다는 책임론 제기가 가능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물론 나는 사실은 심장병을 앓는 후배를 시위 현장의 전위에 내보낸 선배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얘기를 당시에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의심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지만 1999년 유족 측은 민·형사 소송에서 모두 패소한다. 과잉 진압과 고 노수석 씨의 사망 간에 인과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에서 그런 판결이 나왔다.
더 시간이 흐르고 고 노수석 씨는 2003년 국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는다. 이미 인과관계가 없음이 증명됐지만, 국가가 그를 ‘열사’로 인정하면서 그의 사인은 중요치 않게 됐다. 마치 ‘어쩌면 태블릿PC들 따위는 필요 없었는지 모른다’던 손석희 사장의 멘트처럼, ‘어쩌면 외인사 따위는 필요 없었는지’ 모르는 상황이 된 셈이다.
그의 유공자 인정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봐도 당시 분위기로 95학번에 불과했던 노 씨가 시위를 주도했을 가능성은 적다. 특히나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설령 운동권의 상황 설명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더더욱 그는 수뇌부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작 2학년생. 선배들에게 끌려 나오거나 선동돼서 나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다 사고로 죽었다.
게다가 그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연대 사태는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총련 이적단체 판결’을 이끌어낸 사건이다. 그러니, 그가 민주화에 기여한 것은 전혀 없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가 세운 공이라고는 ‘죽은 것’밖에 없다. 그런 그를 유공자로 인정했다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의 희생자 학생들에게 남긴 방명록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죽은 것’이 유일한 공인 사람을 유공자로 부르는 것은 ‘고맙다’는 말이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