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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은희
-퇴계, 땅이 30만 평 이상이고 노비가 250-300명. 조선시대 양반들의 ‘이중성’ 성토 들끓어
-양반층, 17세기 중반까지 묘종법 등 신기술 보급과 간척, 수리관개시설 확장에 적극적 노력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방양반층은 ‘경영인’의 자세 잃고 소작인 의존. 중앙정계 진출에 주력

조선 전기의 지방 양반들은 조상으로부터 분급받은 토지 외에 개간과 개척을 통해 토지를 늘리는 데 주력했다.
얼마전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은 자신의 칼럼 [유성운의 역사정치]”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에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죄악시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실제로는 재산증식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지적하고 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을 예로 들었다.
퇴계 집안의 분재기를 통해서 추정해본 퇴계의 재산은 땅이 30만 평 이상이었으며 노비가 250-300명에 이르렀다. 유성운 기자의 글은 페북의 타임라인 여기 저기에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많은 댓글들이 조선시대 양반들의 이중성에 대해 분노하고 성토하였다.
퇴계 이황이 자신이 소유한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는 일에 깊숙이 간여했음은 학계에서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나는 2000년 쯤에 국문학을 공부하는 지인을 통하여 알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조선시대 가족과 친족의 변화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고 관련 논문들을 읽게 되면서 퇴계 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 양반층에 공통된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지 대중적인 담론에서는 최근에야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듯하며 언제나 그렇듯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역사적인 사실은 단순화되며 왜곡되기도 한다.
그전에 올린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조선시대 500년은 문화적으로 균질했던 시기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국의 전통문화’ 혹은 ‘미풍양속’으로 미화되기도 하는 문화는 후기에 들어와 형성된 문화이다. 부를 멀리하고 일체의 경제활동에서 물러나 글공부에 전념하는 청빈한 선비의 이미지 역시 후기의 문화적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퇴계선생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16세기의 다른 문화에 살았던 인물을 18세기의 들어와 확립된 가치관에 입각해서 비난하는 것이 된다.
조선시대 전기였던 15,16세기 그리고 17세기 중반까지도 재지(在地)양반층(지방의 양반층)은 농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재산을 증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비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농장을 직접 경영하였다. 농지를 경작하는 일은 노비가 하였지만 밭갈이, 파종, 수확에 이르는 전 과정을 계획하는 일은 농장의 주인인 양반이 하였음을 당시 양반층이 남긴 일기나 편지를 읽으면 알 수 있다. 경영인으로서 농사일을 하는 노비들을 감독, 지휘하였고 멀리 사는 외방 노비에게서 신공을 받아내는 일도 대부분 노비를 대동하고 직접 하였다.
농장의 경영인으로서 재지양반은 농업기술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세종 때 간행된 농서 <농사직설>의 농법을 익히고 더욱 발전시켰다. 예컨대 1619년에 민간인 고상안이 경상도 지역의 농법에 대해 저술한 <농가월령>은 <농사직설>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묘종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묘종법은 모내기법, 이앙법, 혹은 삽종법이라고도 하는데 볍씨를 모판에 뿌리고 어느 정도 키워서 논에 옮겨심는 방법이다. 제대로 되면 수확량이 훨씬 많지만 가뭄이 들어 모내기 때 충분한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수확에 실패하기 때문에 농사직설에서는 별로 권장하지 않았던 기술이었다. 거의 2세기가 지난 후에 모내기법이 자세히 농서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 적어도 경상도 지역에서는 벼농사에 있어서 모내기 법을 많이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모내기 시기에 많은 물이 필요한 농사기술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은 수리관개시설도 함께 확충되었음을 의미한다. 재지양반층은 정착한 지역에 하천을 막아 수로를 통하여 하천수를 논에 끌어들이는 ‘보’를 축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아가 수리관개시설을 개선하면서 많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늘리는 일에 뛰어들었다.
세종이 간행한 <농사직설>은 농법 이외에도 황무지를 개간하는 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전기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확장하는 것을 권장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당시 관에서는tory.go.kr/mfront/nh/view.do?levelId=nh_030_0050_0050_0010_0030″> ‘입안절수(立案折受)’라 하여 일정 지역 내의 토지를 개간하는 조건으로 소유권을 개간한 자에게 부여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전기에 경지면적이 획기적으로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조선의 양반에 대해 연구한 미야지마 히로시는 안동지역에서 16,17세기 동안에 농지가 1.5배 정도로 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17세기는 임진왜란 때문에 황폐화된 국토가 복원되었던 시기라고 보면 경지면적의 확대는 주로 16세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많은 양반 문중이 보관해온 고문서들은 16,17세기에 문중의 선조들이 저수지나 보를 축조하는 데 상당한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축보개간(보를 쌓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을 통하여 대농장을 경영했음을 보여준다.
안동의 의성김씨의 파시조인 청계는 퇴계와 동시대를 살았는데 조상으로부터 분급받은 토지 이외에 개간과 개척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토지를 늘려 문중의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안동의 유곡에 세거한 안동권씨의 입향조이며 현조였던 권벌과 그의 자손, 그리고 사학자 전경목이 연구한 전라남도 우반동의 부안김씨 선조들도 16세기에 비슷한 방법으로 경작지를 늘려 곳곳에 대농장을 경영하였다.
내륙지방의 축보개간 이외에 조선시대 전기에는 해안지역에서도 간척을 통한 경지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전라남도 해남의 연동에 세거했던 윤선도의 해남윤씨 집안은 해안지역에 집중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여 광대한 농지를 개발하였다. 윤선도의 집안 이외에도 서울이나 지방의 유력한 양반들은 자신이 자본을 대고 노비와 일반 농민을 동원하여 연안지역을 간척하여 막대한 농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전기 재지양반이 농지개발을 하고 대농장을 직접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수의 노비를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가에서 일상생활에 쓰이는 물품들은 대부분 노비들이 생산하여 공급하거나 혹은 멀리 사는 노비로부터의 신공으로 조달하였다.
임진왜란 때 지방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오희문이 남긴 일기 <쇄미록>에는 노비들이 게으르고 속이고 훔치는 것에 대한 오희문의 불만과 분노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였고 관가에 인도하기 전 사적으로 태형을 가하여 관아에 압송된 그 노비가 얼마 못있어 사망에 이르도록 하였다.
노비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개간하고 간척하여 농지를 확장하는 일은 18세기에 들어서면 거의 끝나게 된다. 미야지마 히로시에 따르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경우 1718-1720년에 있었던 토지조사에서 드러난 경지면적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여 18세기에 들어오면 대부분 양반 가문의 토지소유 규모 역시 변화가 없거나 줄어드는 경향을 분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재지양반층은 농지의 대부분을 직영하지 않고 소작을 주어 지대에 의존하여 사는 지주로 변모하게 된다. 후기로 갈수록 그들은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오랜 기간동안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자가 되는 것에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노비를 이용하여 새로운 농업기술을 적용하고 수리시설을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해안지역을 간척했던 경영자로서의 양반은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사라져 갔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에 살았던 퇴계가 재화의 축적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꼼꼼하게 농장을 경영했다는 것에 실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그러한 퇴계가 보여주는 조선시대 전기의 사회경제문화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변화했는가 하는 문제에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문옥표 등 2004 조선양반의 생활세계
미야지마 히로시 1996 양반
이태진 1989 조선유교사회사론
전경목 2001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