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첩 이야기#13 인생은 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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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고교 때부터 사용해온 PC 통신으로 ‘기득권 운동권 세력의 해체’라는 화두를 잡다

-극단의 페미나치이자 ‘엄마 성 쓰기 운동’의 주창자 모 여성 작가와 키워질에 돌입

-“고소하시고 그대신 개인정보 입수한 경위도 조사받으시라”고 하자 전화 뚝 끊겨 

 

 

 

기댈 곳은 고교 때부터 투쟁의 장으로 사용해온 PC 통신이었다.

대학생 때의 나는 이미 대안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기존 주류 좌파 세력이 하는 주장의 모순을 밝히고, 기득권 좌파 세력을 해체해 외곽에 소외된 진정한 민중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소위 우리 학우들이라고 불리며 사실상 무시당하는 일반 학우들의 목소리를, 학교 밖에서는 여전히 하고 있던 청소년 인권 운동을 하면서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늘 학업과 여러 생활에 바빴고 내성적이기까지 했던 나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었다. 결국, 기댈 곳은 고교 때부터 투쟁의 장으로 사용해온 PC 통신이었다. 내가 새로운 바다에서 꿈꾸던 시대에 걸맞은 혁명이라는 것은 ‘기득권 운동권 세력의 해체’라는 시대의 화두와 ‘PC 통신’이라는 시대의 기술이 결합한 그림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기존 운동권 세력의 해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방구석에서였다. 대학 초년생 때 삶의 변화가 두 가지 있었다. 즉, 하숙하면서 방에 노트북을 두고 쓰게 됐다는 것과 대중교통 비용 정도를 내면 주말 정도에는 PC 통신 기반 모임의 오프라인 회합에 나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앞서 말한 학생인권단체 활동의 기반이 됐고, 전자는 새벽 시간의 키워질의 기반이 됐다. 그래, 하이텔 플라자란에 꾸준히 출몰하는 방구석 전사가 됐다는 말이다.

 

대체로 내가 했던 토론들은 학생 인권 쪽에 집중돼 있기는 했었지만, 다양한 시사적 주제에 대해서도 스무 살짜리가 늘어놓을 만한 개똥철학을 늘어놓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뻘글 생산력은 좀 있어서 이래저래 몇몇 서적의 저자와도 디스와 리스펙을 주고받게 됐다. 그런 일들에 고무되다 보니 스무 살짜리가 상당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만할 즈음에 사건이 터졌다.

 

말하자면 어그로를 남발하는 키워질을 하다가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는 분들을 건드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극단의 페미나치이자 ‘엄마 성 쓰기 운동’의 주창자 중 하나인 모 작가와 하필이면 ‘엄마 성 쓰기 운동’을 갖고 키워를 떴던 얘기다.

 

‘엄마 성’ 쓰기 운동은 새로운 성을 만들지 않는 한 하등 모계와 상관없는 외할아버지의 부계 성 쓰기 운동이라는 논지가 하나였고. 또 하나는 무한히 확장되는 성을 어쩔 거냐는 거였다. 후자에 대해서 그 이후에 선택적으로 고르면 된다는 대응 논리를 개발한 걸로 알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초창기로 그분들은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 씨는 당시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하고 디스전으로 종목을 전환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당시는 키워가 부업일 정도였으니 디스전 정도야 별일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디스전에서도 모씨를 처참하게 조롱해버린 이후 발생했다. 승리에 만족해하며 한잠 자고 있는데 밤중에 전화가 왔다. 나와 부모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하숙방 전화번호로. 심지어 내가 사용하던 아이디도 내 아이디가 아니라 차명이었는데 말이다.

 

참 우악스러운 목소리였다. 다짜고짜 내가 ‘그 사람들’과 합세해 자신을 계속 괴롭히면 고소하겠다는 것이었다. ‘아, 이 사람, 정신이 이상하구나!’ 직감했지만, 이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는 사실은 어린 내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실상 KT 혹은 하이텔의 내부자가 접속한 회선의 전화번호를 주지 않고는 알기 힘든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당신이 말하는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해명했지만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만이 돌아왔다. 이런 해명도, 저런 해명도 통하지 않자 그냥 “내가 당신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안 건드릴 테니 그만 끊자”고 했지만,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이 분의 정신 상태를 보아하니 법정 가서도 질 것 같지는 않아서 결국 “그러면 고소하시고, 대신 개인정보를 입수한 경위에 대해서도 조사받으셔야 할 것”이라고 하자, 갑자기 전화가 뚝 끊겼다.

 

그 뒤로 모 씨에게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불쑥 집 앞에 찾아와서 해코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키워질도 한동안 위축됐다.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스트리킹 퍼포먼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롱거리만 된 뉴스를 접했다.

 

그리고는 잊고 살고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 그녀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덕에 동지 칭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원래는 종북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모르는 일이지만 애초에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은 높았던 분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3 순수의 시대(2)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6 새로운 희망

어느 고첩 이야기#7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1 그들만의 리그

어느 고첩 이야기#12 ‘겉치레 민주주의’ 대학교수들

어느 고첩 이야기#14 어른의 세계

어느 고첩 이야기#15 아이의 세계

어느 고첩 이야기#16 진실은 침몰한다(1)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

어느 고첩 이야기#22 그 해 8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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