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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입으로는 가장 민주적이지만, 태도로는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현정권의 아류 대학교수들
-고교 교사는 학생 통제를 위해 잠재적 교육과정 시행하지만 대학 교수들은 그렇지 않다?
-열린 태도와 학생이 주도하는 수업 지향하는 외형은 그저 패션일뿐. 그들 역시 패션 좌파

내가 말하는 것과 삶이 불일치하는 인지부조화와 이중적 태도의 교수들이 강단에 즐비했다.
당시 나의 작은 혁명의 토양 이야기를 하자면 대학 강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개인의 삶과 의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이 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실 나는 도의적으로는 그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386들이나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명예 386들의 의식과 태도는 스스로 형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입으로는 가장 민주적이지만, 태도로는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현 정권과 그 지지자들, 혹은 386 운동권들의 모습은 그들의 스승 세대와 선배 세대에게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딱, 내가 대학 다닐 때 그 교수들 말이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강단에 서는 교수들 중에 뼛속까지 운동권은 드물었고, 심지어 운동권 제자들을 싫어해 교화시키려고도 했지만.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의 패션이든, 미국 좌파의 영향이든, 유신 시대의 정신적 상흔이든, ‘민주주의’를 강단에서 설파하는 경우가 많았다.
좌파로서의 정체성은 없이 좌파를 정당화시켜주는 논리와 이론은 그대로 설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쁜 악영향은 민주주의를 목소리 높여 강조하면서도 행동은 매우 반민주적이었고 그런 이중적 모습마저 후대가 배웠다는 데 있다. 이 정도면 대략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과실치사 정도로는 말할 수 있겠다.
그 중에 특히 기억나는 교수들이 몇 있는데, 신분 은닉을 위해 구체적으로 쓸 수가 없지만 또 안 쓸 수도 없는 얘기라 몇 명 정도만 언급해보겠다.
A교수는 한국 기독교계에는 꽤 알려진 유명한 단체의 설립자의 아들이지만, 예수보다는 마르크스를, 마르크스보다는 술을 좋아한다는 평이 있던 사람이었다. 노년에는 마르크스를 버리고 전향한 것 같지만 당시만 해도 그랬다.
그는 교육사회학을 가르쳤다. 여러분이 대표적으로 잘 아는 ‘교육의 계층 사다리’니 ‘교육 재생산’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 이론 중에 헤게모니와 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게 있는데, 실제 교육과정 내용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학생이 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행동과 태도 등을 통해 교사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과 같이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기득권력의 헤게모니가 주입된다는 이론이다. A교수는 그런 관점에 동의하면서 고교 교실의 상황을 실례로 들어 이런 교육을 비판했다.
나는 기말과제를 두 가지 했었는데, 하나는 재생산의 강화를 입증하는 설문조사 연구였고, 하나는 대학 강단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분석한 질적 관찰연구였다. 그는 전자는 극찬을 했다. 실제로 재생산이 강화된다는 게 꽤나 큰 표집을 통한 데이터로 입증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후자에 대해서는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교 교사는 학생 통제를 위해 잠재적 교육과정 시행이 필요하지만 자신들, 대학 교수들은 잠재적 교육과정을 실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100% 동일한 태도와 행태, 그리고 심지어 그 순간의 기말과제 평가를 통해서도 강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B교수는 다른 대학 학생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의 학생들이 이 분 강의를 듣기 위해 올 정도로 학계에서는 독보적 존재였다. 그런 그가 1학년생의 전공입문 개론 수업을 맡았다. 겸손이 아니라 뭘 모를 때 자신의 이론을 주입하자 했다는 생각을 그때도 했고 지금도 한다.
그 수업은 고교 때까지 강의식 수업에 익숙하던 신입생들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매주 다음 주 강독의 내용과 관련한 소고를 써오게 했고, 그에 대해 토론을 한 후 강독을 하고, 다시 토론을 하는 수업이었다. 물론 시험은 요새 핫키워드인 오픈북이었다.
상당히 열린 태도와 학생이 주도하는 수업을 지향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해 있어보였지만, 그것은 패션일 뿐이었다. 패션좌파처럼 말이다. ‘토론’이라는 것은 강요의 정당화 과정이었다. 요새 말하는 ‘민주적 회의나 공론화’에 해당되시겠다. 그는 학생들의 생각을 미리 답정너로 상정해놓고 논파하기를 좋아했다. 답정너에서 벗어난 발언은 어떻게든 그 답정너와 같은 뜻이라고 환원시켰다.
하루는 그의 답정너를 미리 예측하고 완전히 반대의 입장으로 답변했더니 “그래 네가 나보다 잘났으니 너는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겠네”라는 식으로 말문을 막아버리고 자기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 뒤로 나는 그의 강의 그대로 써야만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오픈북 기말고사에서도 논술 그딴 거 없고 딱 그의 강의노트를 그대로 써넣어 그 수업에서 전설적인 학점을 받았다.
C교수는 니체를 가르치는 철학과 교수였다. 그는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니체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주체적 단독자로서 행동할 것을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물론 기말고사에서 니체를 부정하는 주체적 단독자로서 행동한 나는 내 대학생활 최악의 학점을 받았다. 내가 그 수업의 모든 기자재를 나른 것은 물론 인생 상담까지 해준 것은 단독자로서 니체에서 독립한 순간 아무 의미가 없었다.
D교수는 교양 미학 수업을 했었다. 미학이라는 것은 고전 미술, 순수 미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며 미학이 얼마나 일상에서 의미가 있는지를 역설했다. 그러나 중간과제로 ‘총몽과 니키타의 미학적 동일성’이라는 과제를 제출한 나는 기말시험에서 만점 답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기 최저 학점을 받았다.
말하자면 내가 말하는 것과 내 삶이 불일치하는 인지부조화, 남이 하는 것은 비판받을 일이지만 내가 똑같은 행동을 하면 좋은 것인 니불내로로 상징되는 자칭 민주주의 집단의 태도는 단순히 군부독재와 운동권 선배들에게만 배운 것이 아니라 대학 교수들에게도 배웠다는 얘기다. 이런 이중적 교수들이 강단에 즐비한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 초년생의 내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사실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랬던 환경 덕에 나는 새로운 바다에서 예의 ‘시대에 걸맞은’ 나의 혁명에 도전할 수 있었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