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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처럼 대학 신입생인 내 가난도 숨길 수는 없었다
-나이키로 깔맞춤한 집단이 중학때부터 노메이커 입어온 내게 “가난한 자 위해 기부하라”
-“가난한 자에게 나눠줘야 한다”면서 부자인 자신의 돈 한 푼도 내지 않고 가난한 자 착취

신발과 잠바를 나이키로 맞춰온 집단이 중학교 때부터 노메이커 입어온 내게 ‘가난한 자’를 위해 기부하라?
내가 꿈꾸던 혁명을 말하기 전에, 그 혁명의 토양이 어떠했는가를 한두 장면으로 묘사해보고자 한다.
대학에 입학할 당시 우리 집은 그다지 형편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대학을 가긴 했으니 아주 하층은 아니었지만, 대학 등록금을 우리 가계로 감당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당연히 통학하고 교재를 사는 비용 외에 학교에서 쓸 수 있는 돈은 점심 값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카페테리아에서 밥, 국, 밑반찬 하나 사먹을 돈이었다.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처럼 내 가난도 숨길 수는 없었다. 당시 이미 이스트팩 유행이 한 바퀴 돌고 난 시점이었지만 나는 중학교 때부터 매던 조다쉬 가방을 여전히 메고 있었다. 잠바도 중학교 때부터 입던 아마도 브랜드도 없는 촌스러운 잠바였다.
행색이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대학 새내기에게 돈을 내라는 요구는 참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요구를 한 사람들은 내 경제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의 형편에 살았던 게 아닌가 싶다. 내 모습은 그냥 ‘촌스러움’으로 치부할 뿐 ‘가난’으로 인식하지도 못했던 걸로 이해해보려 한다.
물론 중2만큼이나 자아의식이 뻗쳐나가는 새내기였으니 그런 그들을 이해하고 수용할만한 포용력이 당시 내게는 없었다. 어느 봄날에 모금함을 들고 운동권 아이들이 나타났다. 멘트는 “부자들이 독식하는 세상을 마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도와달라”는 정도였던 것 같다.
열이 확 올랐다. 나는 내 형편에도 불구하고 기부에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보름 점심값을 어려운 이웃에게 선뜻 기부하고 굶고 다닌 적도 많았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신발과 잠바를 나이키로 맞춰온 집단이 중학교 때부터 입던 노메이커 옷을 입고 있는 내게 ‘가난한 자’를 위해 기부하라는 소리를 하는 건 무개념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희가 먼저 나한테 기부해 보고 그런 소리 지껄이면 어떻겠냐”는 말을 참고 “그 비싼 옷을 팔아서 먼저 돈을 모아보지 그러냐”고 하고 넘어갔다. 아니, 정말 참고 순화해서 한 말이었다.
이런 일은 당시 비일비재했다. 이후 내가 과제로 작은 연구를 했는데 이미 당시 우리 학교에 과외를 일정 기간 받고 입학한 학생이 40%를 넘어섰다는 통계를 뽑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럴 법도 했다. 학원도 안 다녀본 나 같은 녀석이 별종이었던 것이다.
또 한 번 기억나는 장면은 농활을 앞둔 시점이었다. 학생회 선배들이 종강 어쩌고 명분을 붙여 1, 2학년은 의무 참석을 시키고 농활 홍보 활동 같은 걸 했다. 솔직히 당시에는 농활의 의식화 과정으로서의 속성을 몰랐지만, 이미 장학금 달성에 피폐해진 몸과 어떻게든 돈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에 농활 참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반동분자가 됐다.
당시는 아직 혼밍아웃하기 조금 전이라, 즉석에서 대여섯 명에 둘러싸여 면담을 시전했다. 내가 특히 어이가 없었던 것은 학생회장 선배와 바로 위 학번 과 대표가 또 가난과 부를 운운해서였다. 둘 다 강남 8학군 출신이었다. 한 명은 심지어 은마아파트에 살았다.
또 한 가지 빡쳤던 것은 나는 농활의 면제사유가 안 됐지만, 해외여행을 가는 동기는 면제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강남좌파라는 용어로 설명되는 그들에게 ‘해외여행’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정당한 일이었지만, ‘생계 곤란’은 이해가 가지 않는 변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기준이야말로 이들의 속성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알바비를 주면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던졌다. 당연히 그중에 내게 알바비까지 줄 사람은 없었고, 학생회 임원들 사이에서도 알바비를 준다면 자발적 농활이 아니지 않냐는 반응이 나왔다. “자발적인 걸 원하면 끌고 가면 안 된다”며 자리를 떴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세뇌당한 당위에만 사로잡혀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인간이라기보다는 앵무새 같아보였다. 요새는 좀비라는 좋은 용어가 나왔지만.
이런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강남좌파라는 용어는 그 이후 생겨났지만, 이미 이때부터 운동권은 강남좌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과거는 어땠는지 모르지만(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도 그랬을 것 같다. 전태일 평전 초판본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렇고) 이미 당시 학생운동은 눈앞의 가난한 자는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배려하지도 않으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든답시고 자기만족에 취해 탁상공론을 늘어놓는 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이 만드는 세상이 지금의 이니즘 시대다. 그들이야말로 “가난한 자에게 나눠줘야 한다”면서 부자인 자신의 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가난한 사람이 배려를 호소하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발언을 할 사람들이다(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검소했으며 서민들을 위한 제빵학교를 차린 선량한 사람이었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