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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대호
-부국강병·식산흥업으로 가야할 에너지를 실체도 모호한 ‘덕’과 ‘인격’ 수양에 가둬 버렸던 조선
-주관이 개입되기 마련인 정의·공정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장치가 시장이라는 것이 역사적 결론
-현재 공정 담론의 치명적인 패악은 생산력 선도하는 기업, 개인을 도덕·법·규제로 옭아매는 것

거제, 창원, 울산, 포항, 군산, 인천 등이 고철로 전락한 디트로이트 등 러스트(rust) 벨트처럼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 역사를 살피다 보면 왕의 덕 내지 엘리트의 인격수양(수기치인)에 대한 집착·침잠의 패악을 절감하게 된다. 부국강병이나 식산흥업으로 가야할 사회적·정신적 에너지를 밑도 끝도 없고 실체도 모호한 ‘덕’과 ‘인격’ 수양에 가둬 버렸기 때문이다.
매천야록에 실린 고종 초기의 일화란다. 고종이 즉위 후 열린 경연(經筵)에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연운(燕雲)의 땅에 말을 몰아 우리 조종(祖宗)의 치욕(병자호란의 치욕)을 씻는단 말인가?”
이에 무승지(武承旨) -오늘날 국방비서관- 신정희(신헌의 아들)는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면서 내놓은 답이 “전하께서 덕(德)을 닦으시옵소서.”다.
이 외에도 ‘왕의 덕’과 ‘선비의 인격함양(수기치인)’을 답으로 내놓는 대화는 많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조선의 덕이나 인격 수양처럼, 우리의 사회적, 정신적 에너지를 왜곡하여, 물질적·문화적 생산력을 억누르는 가치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공정’이다.
공정이라는 가치는 나도 꽤 많이 강조했는데,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출발선의 평등, 기회의 균등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면 개인과 가족의 자조, 자립을 도우는 정책에 주목하게 되는데, 대체로 복지, 교육, 사회투자국가 담론으로 연결된다. 당연히 지금도 중요한 정책이자 담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정이 사적 자치 영역(시장과 사회) 내지 경제사회 주체 간의 관계를 거칠게 재단하면서부터 발생한다.
지금 한국에서 ‘공정’이 완장을 차고 순찰하며 주먹질과 수갑질을 하는 사회적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 재벌 대기업과 협력업체, 건물주와 세입자, 대형마트와 골목상권, 프랜차이저 본사와 가맹점, 그외 수많은 갑과 을 간의 관계다.
그런데 공정도 정의처럼 원래 애매 모호하고 신축자재하다.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나 교섭력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공정 판관(관료와 정치인과 여론)의 도덕 감정에 따라서도 오락가락한다.
인류가 축적한 지혜는 이 난해한 문제를 잘 작동하는 시장과 사회와 국가(민주주의)를 통해 해결하려 해왔다.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네 맘대로 하라 또는 간섭하지 말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안았다.
하지만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소극적으로 해만 끼치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 하였다. 그 주체는 권력자·통치자·지배집단이다. 이들은 선·윤리·도덕·정의를 어린 백성에게 가르치고, 강제하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성리학 유일사상?)은 오늘날 ‘정의=공정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로 부활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유일사상으로 부활했다. 자신이 선·도덕·정의·공정을 고집하고 강요하기 전에, 먼저 성찰하고 통찰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한 채…
정의·공정은 대체로 이를 해치는 힘센 거악을 상정한다. 한국에서 주로 지목되는 힘센 거악은 자본과 재벌이다. 북한에서는 조국통일=남조선해방을 가로막는 미국과 남한 괴뢰정권일 것이다.
인류가 축적한 지혜는, 주관이 너무 많이 개입되기 마련인 정의·공정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장치는 시장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시장에서 이뤄지는 상거래는 공급자와 소비자가 합의해야(만장일치해야) 성사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유럽, 미국, 일본, 중국에 비해, 잘 작동하는 시장의 대전제인 공급자와 수요자 자체가 적다. 거래당사자 간의 상호선택권과 거부권(대항력)의 비대칭성이 심하다. 또한 수요자·소비자의 선택권이 제한되는 독·과점화된 영역이 너무 많다. 물론 시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치 시장=선거판은 더하다.
정의·공정의 가장 훌륭한 판관인 시장을(그 허물을 침소봉대해서) 불공정의 산실로 몰아붙이면서, 도대체 깜이 안되는 국가권력이 정의·공정의 판관 자리를 꿰차면서 엄청난 불의와 불공정이 양산되고 있다.
한국의 공정 담론은 너무나 편협하고 편향되어 있다. 거의 자본, 재벌대기업, 원청(민간), 프랜차이저 가맹점, 대형마트, 건물주의 횡포만 주목한다. 이들의 처지·조건이 천차만별이고, 갑·을 관계가 얼마든지 역전됨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극단적인 사례(궁중족발 사건, 일감 몰아주기, 기술탈취 등)를 가지고, ‘탐욕스러운 강자’와 ‘착한 약자’ 프레임(편견)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층위에서 갑질이 행해지기에, 동병상련자가 많아서 이런 프레임은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이 프레임은 자본, 재벌, 대형마트, 건물주 등을 탐욕의 화신이거나 범법자로 규정한다. 따라서 국가의 규제와 형벌(엄벌)을 통해서 이들 못된 강자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덕분에 주먹질과 수갑질을 당해야 할 진짜 불공정의 원흉은 자본, 재벌 뒤에 숨어버렸다.
한국의 공정 담론만큼 불공정한 것도 없다.
첫째, 불공정·갑질의 지존이자, 불합리한 규제, 보호와 형벌의 책임자인 정부·공공·정치 갑질을 빼놓고 있기 때문이다.
불공정 특히 우월적 지위를 활용한 횡포=갑질은 대체로 거래 당사자간의 선택권 및 거부권의 제약 내지 격차에서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도나 정보(비대칭성)를 통해 독·과점권을 부여 받은 정부, 정치, 정당이야말로 최대의 불공정행위자 내지 갑질범이다. 아무리 불량한 서비스(규제, 예산, 형벌, 정책, 인사, 감사 등)를 제공해도 시장에서 응징하거나 거부할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분권이라도 제대로 되어 있으면, 기업은 해외로 뜨기 전에 공공서비스(규제, 정책, 예산, 인력 등)가 괜찮은 지방을 먼저 찾아헤맬 것이다. 기업의 지방정부 쇼핑은 지방정부로 하여금 더 나은 공공서비스 공급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유럽, 미국, 일본, 중국 등에 비해 우리나라는 이런 선택의 권리가 현저히 미약하다.
둘째, 불공정 행위가 일어나는 복잡미묘한 현실(실물)을 모르는 강단파의 인상·느낌과 성안 사람들(지대 수취자)의 편협하고 철없는 도덕 감정으로 불공정을 정의하고, 단죄하려 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근로시간, 비정규직 제로화, 직고용 명령, 노조에 편향적인 수사는 물론이고, 경제민주화 담론 등이 대표적이다.
실물을 모르는 강단 학자, 검찰, 법원, 관료, 정치인들의 인상·느낌은 홍영표 식의 지독한 무지(삼성이 번 돈은 협력업체 쥐어짠 결과 운운)나 몇몇 극단적인 사례를 근거로 만들어진다. 또한 자신의 짧은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이 취업하고 (직장에서) 잔뼈가 굵어진 198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경제가 너무나 잘 나갔기에, 정치와 정부의 일은 오로지 정의·공정만 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경제의 양대 기둥은 파이를 키우고, 이를 적절하게 나누는 것인데, 20~40대의 경험이 파이를 키우는 문제를 완전히 뒷전으로 밀어버렸다고나 할까?? 그 결과 격차(불평등, 양극화) 해소가 최고, 최대의 가치로 되고, 그 핵심 방법은 경제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30년에 걸친 중국의 당-정부-산업의 혼연일치 추격과 추월로 인해 반도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력 산업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거제, 창원, 울산, 포항, 군산, 인천 등이 한 때 미국 제조업을 선도하다가 고철로 전락한 디트로이트 등 러스트(rust) 벨트처럼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문정부와 민주·진보·노동과 x86세대에게는 이런 위기가 보이지 않는다.
셋째, 불공정 해소의 기본 해법이, 약자들을 자조, 연대하게 하지 않고, 또 약자들의 선택권과 거부권을 강화하려 하지 않고, 단지 국가권력의 관여, 개입 영역과 수단을 확대하고 강화하려 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 협력업체, 세입자, 을 등의 자조와 연대(대항력)를 강화하는 것은 백안시하고, 또 시장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한 조건을 갖추려 노력하지 않고, 오로지 정부와 공공기관의 손에 더 큰 몽둥이와 더 강한 족쇄를 쥐어주는 것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근로감독관 10배 증원론이 그러한 접근 방식의 전형이다.
그 결과 문재인정부 들어 공정을 파는 권력기관들 즉 법원, 검찰, 경찰, 감사원, 국세청, 공정위, 금융위, 고용부 등이 물 만난 고기처럼 되었다. 털어내고, 잡아넣고, 강제하고 난리도 아니다.
넷째, 현실 인식과 중시하는 가치가 너무 시대착오적이다.
문재인정부와 민주·진보·노동 세력과 x86들의 현실 인식과 가치는 과속이 일상이고 과속으로 인한 대형 사고가 많이 나는 고속도로 관리자의 그것과 닮았다. 이 관리자는 과속을 방지하기 위해 과속 감지 카메라를 많이 설치하고, 범칙금을 인상하고, 안전거리와 안전띠 위반 차량도 단속할 것이다. 어쩌면 과속 방지턱까지 설치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과속(교통사고)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속 시대의 현실 인식과 가치로서 단속을 강화한다면?
현재 우리사회를 관통하는 불공정 프레임은 실물을 잘 알지 못하는 강단 학자·법관·검사·관료·정치인·노조원·논객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이들의 20~40대 시절, 중국이 잠자고 있을 때 먼저 세계 시장으로 내달린 한국 경제의 선점 효과가 살아있던 시절의 단편적인 인상이 굳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김상조 등이 휘두르는 공정 담론의 가장 치명적인 패악은 한 사회의 성장발전의 엔진이자, 물질적·문화적 생산력의 선도자 역할을 하는 창의, 열정, 탐욕의 에너지가 넘치는 모든 기업, 개인을 도덕과 법·규제로 옭아매고 억압한다는 것이다. 지금 해외에서 매출 이익의 80~90%를 얻는 재벌들에게 하는 짓이 그런 것이다.
경제·사회 발전의 엔진은 급속도로 약화되는데, 브레이크만 급속도로 강화되는 나라의 말로는 뻔하다. 바로 덕 만능주의, 인격수양 지상주의로 망한 조선이다. 공정은 잘 쓰면 명약이지만 과하면 독약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너무 과하게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