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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대학 입학 후 운동권과 대치하면서도 좌파 내 대안 찾아. 결국 기득권 권력에 대한 저항
-공산주의자 당성 과시. “이런 건 중학교 때 공부. 알아서 공부할 테니까 참견하지 말라”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틈만 나면 선배들이 면담. 학생회 회장과 총무 2 대 1 면담까지

나는 학생회 주최 OT에 참가하지 않았다. 술판이나 될 게 뻔한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다.
나의 개인적인 투쟁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전까지 나는 지금 생각하면 중2병에 정신승리였지만 우월한 지위를 갖고 투쟁해왔다. 적어도 ‘특이한’ 애였을지언정, ‘소수자’는 아니었으며, 학교계급구조에 저항했지만, 권력의 탄압을 받는 약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인민 대중의 진정한 인권에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인민 대중의 의식과도 괴리된 주류 좌파, 그러니까 눈앞의 대상으로는 운동권 애들과는 계속 대치하면서도 좌파 내에서 대안을 꾸준히 찾았다. 그러나 당시 대학교에서 주류 좌파와 대치한다는 것은 결국 기득권 권력에 저항한다는 의미였다.
일단 시작부터가 반동이었다. 나는 학생회 주최 OT에 참가하지 않았다. 술판이나 될 게 뻔한 그곳에 갈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입학 때부터 ‘관심 사병’이 되었다. 면접 때 꼴통 선비 같은 대답을 한 게 소문이 나 있었던 걸 보면 사실 이미 관심 사병의 가능성이 내게 농후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OT에도 가지 않았던 나는 ‘학회’라는 것을 두 군데쯤 가보고 학회 따위 안 하고 알아서 공부하겠노라고 학회를 보이콧했다. 여기서 말하는 학회라는 것은 진짜 학회가 아니라, 운동권 선배들이 의식화 교육을 시키는 모임을 말한다.
우리 과에는 4개 학회가 있었고, 신입생은 그중 한 곳에 의무가입하거나 선배들과 함께 신규학회를 조직해야 했다. 아주 돌직구로 민주화 운동사를 배우는 학회가 있었는가 하면 학구적인 학생을 위해 철학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학회도 있었고, 소프트한 학생을 위해서는 영화를 통해 의식화를 시키는 학회도 있었다.
나는 그래도 조직의 생리에 적응해보려고 그중 한 곳을 갔다. 사실 나는 민주화 운동사는 중학교 때 이미 어느 정도 훑었고, 그 이후 독학으로 학회 커리보다 자세히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좀 더 소프트한 학회 쪽에 가봤다.
솔직히 지금은 교수님이 다 된 선배들한테 미안한데, 철학을 말하는 학회에서 선배들이 하는 소리는 개소리였다. 지들이 입에 올리는 철학자와 용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지껄이고 있었으며, 모임 장소는 언제나 술집이었다. 술이 좀 들어간 뒤 결론은 언제나 ‘그딴 거 됐고 민주화’였다. 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학회를 안 간다는 것은 우리 과에서 전례가 없었으며 용납이 되지 않아, 영화 얘기를 하는 학회를 갔다. 당시 나는 영화에 심취해 있었다. 물론 학회 장소는 술집이었고. 영화 얘기를 하자고 모여서는 또 운동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영화는 그냥 수업 도입을 위한 도구 같은 것이었을 뿐이었다.
학회를 거부한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원거리 통학과 학과 공부를 핑계로 대자, 설득의 주체가 동기들에서 학생회 임원들로 넘어갔다. 지금은 국립대 교수를 하는 선배가 (우와, 난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게 머리 나쁘고 공부 안 하면서 어떻게 교수가 됐는지 신기하다) 붙잡고 설득했다.
초장부터 싸우기 싫었으나, 어차피 외길 인생 걸어왔고 걷기로 한 거, 니들이 학회에서 가르치는 게 뭐냐고 따졌고 커리를 늘어놓자 내가 제목에 따라 나올 만한 내용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사실 학생회장이라고는 했지만, 주체적 운동가가 아니었던 탓에 본인도 배운 대로 가르칠 뿐이었던 수준인지라 선배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산주의자로서 나의 당성을 한껏 뽐내고 나서 상대방이 조용해질 즈음 이런 건 이미 중학교 때 공부한 거니까 내가 알아서 더 깊이 공부할 테니까 참견하지 말라고 하고 쨌다.
그 뒤로도 나는 과 학생회와 몇 번 부딪혔다. 1학년 1학기 때 한 번 나간 정례적 집회 외에는 일체 한총련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얘기는 이후에도 다른 관점에서 쓰겠지만 농활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사실 대단한 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바쁘고 피곤한데 뻔한 내용인 데다가 술판이라서 시간이 아까웠던 것뿐이었다. 당시 나는 장거리 통학을 하고 있었고, 학업에 허덕이고 있었다. 근성으로 입학한 대학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도 선비지만 당시에는 더 선비여서, 어차피 대충 할 걸 전제로 내준 과제들을 정석으로 하느라고 과제만으로도 주 2~3회는 밤을 새우는 형편이어서 그랬던 것도 같다.
아무튼 그 결과 나는 ‘반동분자’의 낙인이 찍혔고, 수시로 틈만 나면 선배들이 데리고 면담을 했다. 결국, 학생회 회장과 총무 2 대 1 면담까지 받게 된 나는 강수를 뒀다. 니들 활동에 참가를 원하면 니들 학생회비 내역부터 전액 증빙까지 첨부해서 공개하라, 공개 안 할 거면 솔직히 앞으로 내지도 못하겠다고 했다.
대답은 물론. 지금 이니가 하는 꼴 보면 딱 알 수 있다. 증빙은 하나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투명하게 하고 있고, 얼마든지 공개할 수 있다”였다. 그럼 하든지.
결국 거기에 반론은 펴지 못한 채 그렇게 얼버무리고는 그간 내가 피력해온 “내가 알아서 한다”는 주의를 깨기 위한 역공이 들어왔다.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도대체 뭘 하냐는 것이었다. 당성을 또 한 번 뽐내며 학생 인민 대중(당시 용어로는 일반학우라고 보통들 한다)의 대표체로서 너희들의 정당성이 도대체 뭐가 있냐. 너희들이 민주적으로 학우들이 원하는 의제를 선정해서 투쟁하냐고 반문했지만.
상대방은 한 놈만 팬다는 정신으로 공격 포인트를 확실히 정하고 들어왔다. 그래 네 당성은 알겠고 우리의 부족함도 있는데 그래서 너는 혁명을 위해서 뭘 하냐고 캐묻기 시작했다(물론 표현은 조금 달랐다). 사실 나는 당시 여전히 키워력을 높이는 중이었고, 인권단체의 고문을 맡고 있었고, 학교계급론을 설파하고 있었지만. 그쯤 되자 상대방의 공격 목표와 의도가 분명한데 놀아나기는 싫어서 정석으로 해명하지 않고 방향을 돌렸다.
말하자면 일베류 사고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병신인 척’ 말이다. 허경영의 “내 눈을 바라봐, 그럼 넌 행복해지고”의 프로토타입쯤 되는 선언을 해 버린 것이다. 전체주의에 가장 반하는 방식으로.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음을 변화시키고 있다.”
사실 기저에는 강압으로 전체를 다 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학생회와 운동권의 강압을 살짝 비꼬는 마음을 깔았지만, 상대방은 ‘이게 뭔 개소리야’ 쯤으로 들리도록 엄청 진지하게 눈동자를 바라보며 반짝반짝한 눈으로 말한 게 포인트.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선배들은 동공이 흔들렸다. 공격지점의 혼선인지 탈력인지 모르지만, 선배들은 말을 이어가기 힘들어했고, 애초에 약속한 나의 탈출 시간이 다가왔다. 그 뒤로 나는 이 기조로 가기로 했다. 말하자면 “이 대화 보고 조원진으로 정한 것”이다.
‘날적이’라고 당시 돌려쓰는 일기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에도 무슨 디씨 꾸준글처럼 아무도 공감하지 않고 관심 없어 하는 얘기를 틈틈이 썼다. 그러니까 그냥 모기나 개미 잡았던 이야기를 중2병 들어서 판타지 대서사처럼 쓴다든지 하는 헛짓을 했다. 진성 혼모노처럼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뭐, 실제로도 다른 쪽으로 혼모노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 과학생회 선배들로부터 스트레이트한 면담을 요구받지는 않았다. 물론 조금 더 부드럽게 회유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나는 시대에 걸맞은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