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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석희
-PCK는 교육학 지식과 교과내용 지식의 교집합을 현장에서 실천하고 적용, 반성하는 능력
-훌륭한 기타리스트나 락보컬, 철학적 지성이라고 반드시 훌륭한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딪치며 수업 통해 선배 교사나 동료들과 공유하고 PCK 쌓아야

PCK는 교육학적 지식과 교과내용 지식의 교집합을 현장에서 실천하고 적용, 반성할 수 있는 능력까지 의미한다.
오늘 우리 학교 연구부장님의 공개수업을 참관했다. 자기 수업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 훌륭한 수업이란 무엇인지, 이 교과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수업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수업을 연구하고 준비한다는 것이란 어떤 요소들을 사전에 고려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나도 수업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까지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1학기에 다른 선생님의 공개 수업도 두 번 봤는데, 모두 발상부터 수업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완성도가 높았다. 나는 진심으로 마산초등학교가 첫 발령지라는 점이 자랑스러웠다. 왜 우리 학교는 수업 명인들만 있냐고 나는 교무부장님께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나는 넉살을 피우기보단 사실 반성하고 있었다.
나의 음악 시간들을 생각해봤다. 장구를 지도하면서, 장구채를 잘못 잡았다는 지적을 아이들에게 들었을 때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건, 내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나 사회, 도덕이나 국어,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에서는 내가 사소한 실수를 하더라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 않다. 그저 아이들을 귀엽게 생각할 뿐이다. 나는 그것들에 자신이 있고 어차피 애들은 나보다 그것을 못하거나 사소한 몇 가지의 교정 가능한 오류가 내 능력을 다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과 체육은 다르다. 실수를 지적 받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위축된다. 그것은 내가 진심으로 작아지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건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학생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작아진다는 것이다.
PCK라는 용어가 있다. 교수학적 내용 지식(Pedagogical Content Knowledge)이라는 말로, 미시건 대학의 리 셜먼(Lee Shulman)이라는 학자가 2000년대 들어 대중화시킨 개념이다. 나는 교육대학교 학부 과정에서 이 개념을 처음 접했다. 만약 교대 출신 초등교사들이 자신들의 전문성과 사회적 지위의 근거를 찾는다면 우리가 반드시 짚어야 될 개념은 바로 PCK다.
PCK는 교육학적 지식과 교과내용 지식의 교집합을 현장에서 알맞게 실천하고 적용, 반성할 수 있는 능력까지 의미한다. <스쿨 오브 락>과 달리 훌륭한 기타리스트나 락 보컬이라고 반드시 훌륭한 음악 선생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례에서 보듯 훌륭한 철학적 지성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도덕 선생님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시민으로서도 철학자로서도 스승으로서도 뛰어났다. 그래서 종합적인 인간의 완성을 지향했던 서구는 고대 그리스 이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그 이후에도 종합적 지식인의 모범으로 소크라테스를 자주 호명하였다.
연구부장님은 ‘재활용품 분리제출’이라는 내용을 2학년에게 가르쳐야 하는 까다로운 상황에서 재활용 제도와 실태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재밌는 교육 게임으로 산출해내셨다. 더군다나 스스로 아이들이 버린 쓰레기들을 사진으로 찍고 카드로 만들어 뒤에 스티커처럼 붙일 수 있게 해 커다란 도화지에 쓰레기 카드들을 분류하게 했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모은 재활용 쓰레기들을 플라스틱 바구니로 만든 함에 분리 수거를 할 수 있게 했다.
단순히 분류 활동으로 그친 게 아니라 ‘고래를 살려요’라는 게임을 통해 아이들이 직접 고래의 뱃속에 가득찬 쓰레기 카드들을 가져가게 해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감수성과 분리수거 문제가 카드와 관련이 있다는거, 고래와 동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까지 어린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당연히 배운 내용을 제대로 모르면 활동을 할 수 없으므로, 평가는 수업과 같이 일체화되었다.
PCK는 이처럼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최대한 교육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인 지식이다. 재활용과 환경에 관련된 문제를 공부할 때, 전공서적을 숙독하고 구글을 리서치한다고 좋은 수업에 대한 영감을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아이들의 특성, 버릇, 지식, 요구를 관찰하고 충분한 교수학적, 교육학적 장치들을 통해 걸러내고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더 좋은 음악 수업을 하려고 한다면, 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는 노력은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문제는 음악과 아이들을 관계 짓고, 그로부터 더 좋은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음악 교과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르치는 교과와 내용에 그만큼 관심과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수업은 모든 예측을 뛰어넘는 일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통합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전장과 똑같다. 나는 수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애매할 때면 작전을 바라보는 눈으로 수업을 바라본다. 교육대학이 충분한 PCK를 제공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병과학교가 있는 상무대가 간부들에게 제대로 된 리더십 교육과 양질의 제병협동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비슷하다. 병과학교들이 병과에 국한된 보수교육을 간신히 제공하듯 교육대학도 그저 교과서, 지도서의 내용인 교과교육 내용학을 제공할 뿐이다.
실천에서 걸러내고 끌어내는 교육학과 내용학과 교수적 기술, 그를 통합하는 메타 인지를 통칭하는 PCK. 나는 그것이 현장 교사들이 내세울 수 있는 자존감이자 전문성, 존재의 근거, 이런 모든 것들을 포함할 수 있는 정체성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교수님들은 내용학 전문가들이지, PCK를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대학교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진다. 교수님들이 PCK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은 교수법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정말 낡은 교수법으로 재미없게 가르치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될 것이다. 결국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딪치며 수업을 통해 교육을 실현해야 하는 교사는 선배 선생님들이나 동료들과 공유하고 PCK를 쌓아나갈 수밖에 없다. PCK를 쌓아나가야 하는 것은 좋은 수업으로 나 자신을 만족시켜 정말로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걸 공부하고 느끼라고 일선 학교에서 수업 비평이라는 걸 하나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산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일하고 배우게 된 점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