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글쓴이 : 정아재
–정치에 ‘참여’하는 대중의 기회 확대. 괴벨스 같은 능력자 없이도 본격 대중선동 가능해져
–학생복지회 모임 규모가 커지고, 오프라인 활동이 적극적이 되면서 파리들이 꼬이기 시작
–몇 년간 애정을 들여 키운 학생 인권 운동의 큰 산이 좌파 성인단체의 의식화 양성소 전락

PC통신은 괴벨스 같은 능력자 없이도 대중선동이 가능한 시대를 열었다.
고교 시절은 혁명의 여러 국면에서 실망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것은 다른 집단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내가 속한 학생 인권운동 그룹에 대한 실망이었다. 실망의 정점은 정확히는 대학 초년생 때에 왔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고교 시절에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대중의 인식과 혁명의 이상 간의 괴리를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운동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마침 새롭고 강력한 무기가 손에 쥐어졌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케텔이 하이텔에 되면서 PC 통신은 대중도 접근할 수 있는 세계가 됐다. 이 신기술로 고등학생도 뭔가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그래, 키보드 계몽 전사, 즉 키보드 워리어 말이다.
사실 나는 지금도 대중의 정치 참여와 인식에 기술이 가져온 변화가 너무 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한 기술은 무슨 오바마의 트위터 선거운동 같은 소리가 아니다. 당시는 중학생 정도였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도 정치에 관한 목소리를 공적으로 낼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다.
과거와 비교하자면 정치에 ‘참여’하는 대중의 기회가 확대된 동시에 수준이 전락하고, 괴벨스 같은 능력자 없이도 얼마든지 선동 정치를 할 수 있는 시대, 본격 대중선동 정치 시대가 꽃을 피울 수 있게 된 어마어마한 변화다. 물론 이 ‘대중선동 정치’는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의 용어인 ‘광장 민주주의’로 치환해도 된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촛불 선동의 프론티어로 활약했다. 적극적으로 학교 계급론을 설파하기도 했고, 플라자란에서 꽤나 이슈가 됐던 토론에서 당시의 몇몇 네임드들과 디스전을 벌이기도 했다.
독고다이로 학생인권을 설파하던 나는 그 과정에서 ‘학생복지회’라는 소모임의 초창기 회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복지’라는 용어가 지금은 명확하게 다르게 쓰이지만, 당시만 해도 ‘복지’는 곧 ‘인권’의 보다 마일드한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다. 줄여서 ‘학복회’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아수나로 등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청소년 인권운동 단체의 가장 초기 모델 중 하나다.
물론 앞서 몇 번 언급했지만 당시의 주된 논의는 체벌, 두발과 복장 정도였다. 학교 계급론과 학생이 주인 되는 학교생활규칙은 먼 미래의 이상향이었어도 그 모임에서는 받아들여지는 논리였다. 여러 번의 플라자 토론에서 나는 젊은 혈기까지 더해진 키워 성향을 발휘해 그곳의 의제들을 확산하는 데 애썼다.
고교 시절의 나는 넷에서는 혁명의 전사였지만 현실에서는 활동 반경이 매우 좁았다. 그래서 한 번도 어떤 PC 통신 커뮤니티의 오프라인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이들 그룹과 만나며 활동한 것은 대학생 때였다.
나는 이미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중·고생을 ‘청소년’으로 상정한 학복회의 핵심간부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고문을 맡았다.
그렇게 학복회 활동을 하던 중 모임의 규모가 커지고, 오프라인 활동이 적극적이 되면서 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중 기억나는 경험은 먼저 이 단체를 이용해 장사를 하려는 경우였다. 당시 핵심의제는 체벌 문제였는데 어떤 ‘발명가’께서 단체의 유명세를 빌어 발명품인 ‘체벌 기계’를 팔려고 직접 오프라인 모임까지 찾아왔다.
교사들의 감정적이고 과도한 체벌을 방지하기 위해 정해진 횟수로 정해진 강도로 회초리를 때리는 체벌 기계(참신한 병신 같은 생각이다)를 고안한 그 아재는 우리 앞에 시연도 하고, 보고서도 보여주고, 박람회에 물건도 내놓은 전력을 자랑하면서 우리 단체의 추천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최대 학생 인권단체였으니 팔릴 만한 이름이기는 했다. 다행히 대다수 핵심 회원은 일단 장사에 이용된다는 것을 싫어했고, 둘째 체벌을 아예 없애야지 이런 어정쩡한 타협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어서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그보다 내 의식에 영향을 끼친 사건은 ‘정치꾼’들의 접근이었다. 나는 철저히 청소년 인권 단체는 청소년 자신들이 운영하고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교 계급론의 관점에서도 이것이 맞았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도 이것이 맞았다. 사실 고문도 그래서 내가 스스로 임원 자리를 사양하고 떠맡은 것이었다.
그런데, 나와는 생각이 다른 학복회 OB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학생이 되면서 적극적으로 한총련에 포섭되면서 학복회를 서고련과 같은 한총련 산하단체 내지는 투사 양성단체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들을 통해 한총련이 손을 뻗어왔다.
갈수록 그 ‘형들’의 입김이 강해지는 것을 보게 됐고 이 점이 불편했다. 그러나 학복회의 현직 임원들은 아무리 공인 키워지만 오프라인 모임에 OB가 되어서야 출석한 나보다는 그전부터 함께 부대껴온 형들과의 관계가 더 끈끈했다.
결국 어느 날 투쟁 방향에 대한 논의에까지 ‘형들’의 주장이 등장했다. 열혈 청년이었던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학생의 주체적 인권을 말하고, 학교 민주화, 계급 해방을 말하면서 어떻게 지금 정치성향이 명확한 성인 단체의 주장에 휘둘리겠다는 것이냐. 똑같은 결론이라도 주체적으로 순수하게 학생 인권의 입장에서 결정하라고 일갈했다. 돌아온 것은 ‘너도 어른인데 네가 참견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지극히 논리적으로 맞는 얘기였다.
나는 결국 그렇게 몇 년간 애정을 들여 키운 학생 인권 운동의 큰 산이 좌파 성인 단체의 의식화 양성소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학복회가 한총련의 유입 통로가 되어가는 모습이 너무 아팠던 나는 계속 지켜보지 못하고 다시 독고다이로 돌아왔다. 지금도 나는 그 시대 이후로 우리나라의 순수한 학생인권운동이 좌파의 홍위병으로 전락했다고 본다.
물론 학생인권운동에 대한 미련을 다 접은 것도 아니었으며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홀로 학생인권 운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대학교 졸업 논문으로 학교생활규칙을 통한 학생인권탄압을 다뤘고, 직접적으로 학생인권조례의 기틀이 되는 주장, 학생인권은 헌장으로 해서는 소용이 없고 학교생활규칙보다는 상위의 법령으로 규정해야 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물론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니었고 최초는 그보다 2년 정도 앞서 나오기는 한 것으로 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내에서도 자신의 집단적 정치력을 위해 자신들의 가치에 위배되는 당시 주류 좌파였던 한총련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계열과 거리를 두면서 비주류 좌파 혹은 대안 좌파로서 정체성을 갖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