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역사가의 낭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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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승기

 

 

조선인 유식자(有識者)들에게 만주는 귀중한 현장 경험을 제공하는 학습의 사다리였다.

만주인맥이 경험한 만주국의 ‘압축성장’의 원형은 대한민국에서 ‘조국 근대화’로 부활하였다.

역사가와 미디어는식민지 엘리트들의 대한민국 만들기를 부정하고 폭압적으로 침묵을 강요한다.

 

역사가 강만길 선생이 박정희 前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문장을 읽은 기억이 없다. 터무니 없다 싶은 비판은 여러 번 접했다. 어떤 개인사가 작용하였든, 강만길 선생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일본의 괴뢰 만주국 장교 출신으로서, 또 해방 후에는 우리 군대의 장군으로서 민주적으로 성립된 정부를 군사 쿠데타로 뒤엎고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정부가 1965년에 처음으로 한일협정을 맺었을 때” … “제국주의 일본의 괴뢰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정권의 죄과가 얼마나 큰지 우리사회 일반이, 그리고 우리 역사가 아직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공부의 시대 – 강만길의 내 인생의 역사공부』, 창비, 2016, 128쪽, 130쪽).

 

괴뢰(傀儡) 만주국과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1931년 만주국 작전주임참모 시절 만주사변을 기획한 이시하라 간지는 참모본부 작전부장으로 재직 중 중일전쟁 전선 확대에 반대하여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좌천되었다.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와 대립하다가 1940년 도조가 육군대신이 되자 예비역에 편입된 인물이다. 그는 滿蒙(만주와 내몽골)은 일본의 ‘생명선’이며 이곳을 거점으로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하는 최종 전쟁을 대비하고자 했다.

 

만주국을 축으로 한 동아시아의 연대를 꿈꾼 그에게 만주국은 일본인·한인(漢人)·조선인·만주인·몽골인이 공동체를 이룬 오족협화(五族協和)의 독립국이었다.

 

만주국을 축으로 한 동아시아의 연대를 꿈꾼 그에게 만주국은 일본인·한인(漢人)·조선인·만주인·몽골인이 공동체를 이룬 오족협화(五族協和)의 독립국이었다. “동아시아 각 민족의 단결과 협력으로 세계평화를 지향한다”를 지론으로 오족공영(五族共榮), 민족협화(民族協和)를 꿈꿨다. 당연히 한반도의 식민통치에도 반대했다(아스다 고이치 지음·이재우 옮김, 『일본‘우익’의 현대사』, 오월의 봄, 2019, 133~146쪽).

 

‘괴뢰’란 허수아비(傀)이자 꼭두각시(儡)를 말한다. 괴뢰 만주국은 ‘일본의 꼭두각시인 만주국’이다. 일본과 교전 상대국인 연합국이나 중국 입장에서 만주국은 당연히 괴뢰국이다. 만주국의 ‘실체’를 보아도 괴뢰국이라고 부르는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식민지에서 분리 독립한 대한민국이 만주국을 마냥 괴뢰국이라고 능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선인의 만주국 경험에서 볼 때 그렇다는 뜻이다.

 

만주국의 조선인

 

만주국은 <커피 한 잔> <님은 먼 곳에>를 남긴 불후의 대중음악가 신중현이 유아기를 보낸 땅이고, 도쿄 고등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한 음악 유학 1세대 임원식과 김성태의 고향이다. 조선영화의 개척자 이규환은 만주영화협회(滿映)에서 수학했고, 음악가 김성태는 만영(滿映) 제작 계몽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징용과 학도병을 피해 만주로 넘어간 조선 음악가들도 만주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가고파> 작곡가 김동진, 연주가 전봉초는 신징(新京)교향악단에서 기량을 뽐냈다(한석정, 『만주모던』, 문학과 지성사, 2022, 407~428쪽).

 

일본 유학파 시인 백석은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와 안동세관에서 근무했다(『만주모던』, 118쪽).

 

1938년 개교한 만주 국립 건국대학 졸업생 중에는 조선인이 50명이 넘었다. 건국대학의 개교 이념에는 이시하라 간지의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이상이 녹아 있어 여러 민족을 입학생으로 받았다(『만주모던』, 122쪽). 건국대학에서 강의한 최남선은 조선 출신 유학생들의 버팀목이었다.

 

박정희가 입교한 펑텐군관학교(奉天軍官學校, 2년제)는 1932년 개교 이해 조선인 87명을 배출했고, 1939년 개교한 신징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4년제)의 조선인 졸업생은 48명 정도였다. 군관학교 우등생에게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엘리트 조선인들은 일본 고등문관시험, 조선 변호사시험, 만주국 고등문관시험 모두에 응시하였다. 만주국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면 만주국 공무원 훈련기관인 대동학원(大同學院)에서 훈련받기도 했다. 1945년 무렵 만주국의 조선인 비율은 3.4% 정도였으나 만주국 전체 의사 대비 조선인 의사 비율은 13%쯤 되었다(2,046명 중 261명)(『만주모던』, 121~123쪽).

 

건달들에게 만주가 한탕을 노리는 기회의 땅이었다면, 조선인 유식자(有識者)들에게 만주는 귀중한 현장 경험을 제공하는 학습의 사다리였다. 계층 간 이동이 거의 보이지 않던 재일조선인 사회와는 이 점에서 크게 달랐다.

 

‘쿠데타’와 ‘혁명’ – 『사상계』의 용어 선택

 

당대 최고의 교양지 『사상계』는 ‘민주적으로 성립된 정부를 군사 쿠데타로 뒤엎고 정권을 탈취한’ 5.16 쿠데타 세력을 공박하기는커녕 오히려 ‘5.16 혁명’을 지지했다. 5.16 거사 직후인 1961년 6월호 『사상계』를 보자. “革命 새벽에 오다”는 제목의 화보와 함께 편집인 장준하는 ‘5.16 혁명’에 대한 기대를 이렇게 표했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을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 5.16.革命과 민족의 진로’).

 

만주국 경험 – nation building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중국인들이 문화혁명 시기까지 모택동 정권으로부터 고초를 겪었는데, 조선인 만주군관학교 출신 ‘친일파’들은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다는 비난이 있다(MBC TV의 역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강만길 선생의 시각이다.

 

2차 대전 후 전범을 처벌한 동경재판 법정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南京) 진입 과정에서 중국 군인과 민간인 12만 명 내지 35만 명을 살육하였다고 판단했다(南京大屠殺, Nanjing Massacre). 무신경한 일본 신문은 일본군 장교들이 벌인 ‘100인 참수(斬首) 경쟁’을 주인공 두 소위의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했다. 일본이 중국에 대해 이런 저런 잔혹극을 연출하였으니, 대만 출신 지원병들도 종전 귀환 후 적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장개석 치하에서 힘든 세월을 보냈다.

 

일군(一群)의 역사가와 동류(同類)의 미디어는 만주국에서 훈련된 관료, 개척 영농인, 기업인, 군인, 관현악 단원, 문인, 교사, 엔지니어 등 식민지 엘리트들의 대한민국 만들기를 부정하고 폭압적으로 침묵을 강요한다.

 

만주인맥이 경험한 만주국의 계획경제, 산업화, 도시개발, 동원 체제라는 ‘압축성장’의 원형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 ‘조국 근대화’로 부활하였다. 만주에서 단련된 前일본군 장교들의 작전 능력 없이, 중국과 소련을 뒷배로 한 김일성의 기습공격으로부터 대한민국의 방어는 불가능했다. 느닷없는 ‘항일서사(抗日敍事)’의 과장된 소용돌이 가운데 200만 조선인이 생존의 땅으로 삼았던 만주국은 억지로 잊혀졌다. 일군(一群)의 역사가와 동류(同類)의 미디어는 만주국에서 훈련된 관료, 개척 영농인, 기업인, 군인, 관현악 단원, 문인, 교사, 엔지니어 등 식민지 엘리트들의 대한민국 만들기(nation-building)를 부정하고 폭압적으로 침묵을 강요한다.

 

[출처] 어느 역사가의 낭만(2) | 작성자 홍승기 변호사

**작성자의 허락을 얻어 모셔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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