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은 정치의 중심에 서라 II 국정운영에 관한 기획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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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웅(데이터정경연구원 원장)

 

-노태우 정부는 대선 공약대로 중산층 시대(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었다.

-YS는 제대로 된 ‘국정 기획’의 머리를 빌리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정부였다.

-문민정부 인사 실패의 주된 이유가 준비되지 않은 폴리페서를 다수 썼기 때문이다.

 

 

(1) 국정기획에 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 중산층 시대와 북방정책으로 성공한 노태우 정부 : (일반적으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담당하는) 국정운영에 관한 컨트롤타워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기능은 국정운영 기획이다. 노태우 정부는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 차관급 안보보좌관(안보정책, 국방관리/안보협력/국제안보 비서관)과 정책보좌관실(정책기획/조사연구/ 특수업무추진 비서관)을 신설하였다. 이 두 조직의 임무는 노 정부의 가장 중요한 어젠다인 북방정책을 기획추진(정책), 지원(안보)이었다. 특히 정책보좌관은 국정기획, 여론조사, 대통령 PI 등까지 담당하도록 했다. 이는 노 정부 청와대에서 처음으로 신설된 기능이다. 노 대통령은 북방정책을 핵심 어젠다로 설정했고, 박철언 정책보좌관에게 총괄기획/추진을 임무를 맡겼다. 박 보좌관은 7·7선언 준비팀장까지 직접 맡아 對러 및 對중 수교를 기획・추진하였다. 한편 박철언은 검사 시절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5공헌법의 기초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후 청와대 정무1비서관과 안기부장 특보를 역임한 기획통이었으며, 정무직이었기 때문에 13대 의원 당선 이후에도 그 자리를 유지하다가 ‘89년 정무1장관으로 보직을 옮겨 다시 3당 합당을 기획하고 추진한다.

 

한편 ‘밀실’ 운영이 말썽이 된 정책보좌관실은 ‘897월 박철언의 정무1장관 임명으로 자연스럽게 폐지가 된다. 하지만 19894월 차관급 사회담당보좌역을 신설해 김학준(前12대 의원)을 임명하며 부분적으로 부활시킨다. 이 조직은 현재의 시민사회수석실과 유사하게 학원·노사·언론계·종교계 등 시민사회와의 소통 및 갈등해결을 주된 임무를 맡겼다. 더불어 노 대통령의 임기 중반 핵심 과제인 공안정국 조성중간평가 연기에 대한 여론조성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서울대 교수 출신인 김학준은 13대 대선 기간 중 여론조사를 통한 정세분석과 유세이론을 담당했으며, 노 정부 출범 이후 민화위(民和委) 총간사를 맡아 준비된 조사기획전문가였다. 그 후 사회담당보좌역은 199010월 조직 개편으로 정책조사보좌관으로 원 위치했으며, 1992년 3월 광고전문가인 임인규(前13대 의원, 前민정당 선전국장)가 뒤를 이어 대통령과 정부의 치적 홍보에 치중하였다.

 

북방정책을 추진해 소련, 중국 등과 줄줄이 수교했고 88올림픽에 공산국가들이 대거 참가하는 개가를 올렸다. 7・7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도 이끌어냈다.

 

노태우 정부는 대선 공약대로 중산층 시대(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었다. 주택 200만호 공급을 이행했으며, 경부고속철도 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북방정책을 추진해 소련, 중국 등과 줄줄이 수교했고 88올림픽에 공산국가들이 대거 참가하는 개가를 올렸다. 7・7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도 이끌어냈다. 연평균 8.5%라는 높은 성장률을 토대로 매년 평균 임금은 20% 상승했으며 ‘마이 카’ 시대를 열었다. 이 모든 성과는 국정 기획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그 기획은 탁월한 국정기획 전문가들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은 정치와 정책, 그리고 전략기획 분야를 두루 거친 전문가였다.

 

. 경제 분야 개혁에만 올인하다 실패한 김영삼 정부 : 문민정부는 대선 당시 약속한 바대로 한국건설을 구호로 내걸고 출발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청와대를 중장기적 국가전략의 기획 기구로 전환, 강화하도록 그 기능을 대폭 보강하고자 했다. YS는 이 목표 달성을 위하여 정책조사보좌관(정책보좌관)을 폐지하고 정책수석을 신설, 개편하였다. 하지만 정책수석으로 내정된 전병민이 구설수로 낙마하는 바람에 정책수석실 구상까지 백지화해버렸다. 그리고 교육문화수석(교육/문화체육/사회1・보사부/사회2・재야단체/정책조사)을 신설·개편하였다. 결국 직전 정부에서 차관급이 담당하던 여론수렴(정책조사) 기능을 오히려 한 단계 낮춰버린 셈이다. 이어서 YS는 집권 후반기 국정지표를 세계화(Segyehwa)’로 새롭게 설정하고 1994년 말 조직개편을 통해 정책기획수석실을 신설하였다. 또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종합적인 국가개혁의 방향으로 세계화 전략를 추진하며, 이를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정책기획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개혁은 곧 반개혁적 인물을 상징하는 공화계(김종필계)와 민정계(박철언 등)의 축출을 의미했다. 그런데 국가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세계화 전략은 사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WTO 출범과 자유무역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김종필, 박철언 등 반대파 정치인들이 민자당의 세계화 이미지에 맞지 않고 반개혁적이라며 축출하는 논리로 활용하였다. 또한 1996년 선진국 진입의 관문이라고 여겨지는 OECD에 가입했으나 시장개방, 특히 농산물개방에 따른 부담만 안고 말았다. 알맹이 없는 성급한 선진국 진입 선언인 셈이었다.

 

한편 YS의 리더십은 DJ와 마찬가지로 만기친람형, 권한집중형이다. 더구나 임기 내내 여대야소의 국회라는 좋은 환경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취임 초 신경제 100일 계획을 추진했으나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워 하나회를 해체하고, 비밀리에 금융실명제를 단행하며, 부정부패 사정 및 공직자 재산공개와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로 국민적 인기가 치솟았다. 두 전직 대통령을 쿠데타 혐의로 법정에 세우며 국민적 열광을 받았다. 그러는 가운데 경제는 후순위로 밀려났고 금고가 텅 빈 사실도 모른 채 외환위기를 당한 치욕을 겪고 말았다. YS는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라고 하며 큰 소리 쳤지만, 제대로 된 국정 기획의 머리를 빌리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정부였다. 특히 행정경험이 전무한 교수 출신을 집권 초부터 청와대와 내각에 전면 배치한 김영삼의 배짱은 무모할뿐더러 아둔하기까지 하다. 국가지도자로서 리더십에 의문이 들 정도이다.

 

<표 3> 1998년 중간선거 당시 백악관의 주요 참모 현황

직책 이름 경력
비서실장 어스킨 볼스 1975 모건스탠리 근무

1992 클린턴 대선캠페인 선거기금담당

1993 중기청장, 부비서실장(운영담당)

부비서실장(전략담당) 존 포데스타 1972 조지 맥거번 대선캠페인 참여

1993 WH보좌관(수석정책고문)

1997 부비서실장(위기관리담당)

부비서실장(정책담당) 실비아 버웰 1990 매킨지컨설팅

1992 클린틴 대선캠페인 경제팀장

1995 재무장관 비서실장

수석고문(정책·전략 총괄) 램 임마누엘 1988 민주당 하원선거캠페인 총책임자

1989 시카고시장 선거캠페인 책임자

1992 대선캠페인 재정책임자

정치·전략담당고문 그레이그 스미스 1978 아칸소 주지사팀의 핵심

1992 대선캠페인 정치전략담당

1997 백악관 인사실

커뮤니케이션담당고문 앤 루이스 1981 민주당 전국위원회 정치국장

1994 미국부모연맹 이사

1995 클린턴 재선 커뮤니케이션책임자

※ 출처 : 데이터정경연구원 정리(2022)

 

. 경제문제에 올인해 재선과 중간 선거를 돌파하고, 탄핵소추까지 넘어선 클린턴 사례 :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을 걸고 집권한 클린턴 행정부는 재임 8년 기간 실제로 4%가 넘는 엄청난 경제성장률로 미국 국민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미국 중간선거는 대통령이 속한 정당의 하원의석이 평균 28석 정도 잃기 때문에 여당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유권자의 높은 기대치에 못 미쳐 ‘대통령 당(여당)’이 심판 받는 일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1900년 이후 중간선거 결과를 살펴보면 대공황 당시인 1934년 루스벨트 정부와, 경제호황을 누리던 1998년 클린턴, 9·11 테러 직후였던 2002년 조지 W 부시 정부만이 중간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하는 행운을 누렸다. 1998년 클린턴은 르윈스키 스캔들 때문에 탄핵 직전까지 몰리는 위기에 닥쳤다. 집권 6년차 병까지 앓으며 정치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중간선거 패배가 기정사실이었다. 공화당은 클린턴의 이러한 도덕성을 집중 공격하는 네거티브 선거전을 펼쳤고, 깅그리치 하원의장이 이끄는 공화당 지도부는 르윈스키 보고서를 공개하고 탄핵이 가능한 범죄가 발생했는지 여부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오히려 클린턴 탄핵에 반대하는 개표결과로 나타났다. 성추문과 야당의 탄핵소추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경제 하나 만큼은 챙긴 덕분에 클린턴은 중간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클린턴 집권 바로 1년 전인 1992년 미국의 1인당 GDP26350달러에 불과했으나, 1998년 중간선거 당시는 32818달러로 연평균 4.1%라는 놀라운 성장세를 나타냈다. 결과적으로 클린턴 행정부는 1기 선거 당시 가장 핵심적으로 약속한 바대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경제를 거의 완벽하게 해결함으로써 다른 약점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를 선거전에 적절하게 활용해 특히 집권 6년차 중간선거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던 여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한편 1998년 중간선거에서전략담당 부비서실장(르윈스키 스캔들 등 위기관리 담당) 존 포데스타수석고문(정책·전략 총괄) 램 임마누엘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더불어 이른바 클린턴의 아칸소주지사 시절부터 핵심 측근이던 정치·전략담당고문 그레이그 스미스커뮤니케이션을 책임앤 루이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선거일 보름을 남겨두고 본업인 금융회사로 되돌아간 어스킨 볼스 비서실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핵심 참모들은 모조리 정무전략기획분야 전문가라는 점이다. 이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 맡아 정책·전략을 기획 및 조정하고 중간 선거를 돌파했으며 클린턴의 임기를 무난하게 마무리하도록 도왔다. 선거는 물론이고 국정도 역시 기획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 애국주의 마케팅으로 재선을 돌파하고 최고의 국정운영지지율을 기록한 레이건 행정부 사례 : 1980년 레이건은 현직 대통령 카터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4년 전 카터가 역시 현직인 포드를 꺾은 후 현직 대통령이 연속 패배한 두 번째 대선이었다. 공화당 후보가 현직 민주당원을 꺾은 것도 거의 100년 만에 처음이었다. 정치 분석가들은 레이건의 승리가 보수주의의 부상으로 정치적 재편성으로 간주한다. 이때의 대선에서 레이건은 약 10% 득표율 차이와 489인의 선거인단(총 538인)을 싹쓸이했다. 1970년대 미국은 저성장, 고금리, 고물가, 에너지 위기 등으로 수많은 국민이 고통에 시달렸다. 레이건은 카터와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적절하게 조직하는데 주안을 두었고 이는 성공했다. 특히 197810월 이란의 대규모 봉기와 석유시설 파괴가 세계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카터는 레이건을 위험한 우익 극단주의자로 공격하고 레이건이 메디케어와 사회보장 제도를 삭감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유권자들은 레이건의 손을 압도적으로 들어주었다. 레이건은 국방비 지출 증가, 공급 측면의 경제정책 이행, 균형 예산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또한 레이건은 준비된 자기 방어뿐만 아니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할애하며 ‘애국주의’를 호소하였다. 한편 4년 뒤 대선에서 레이건은 민주당 부통령 출신 먼데일 상대로 득표율은 18% 차이, 선거인단은 525인 대 13인이라는 엄청난 대승을 또 한 번 세웠다.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에서 승리하는 진기록과 73세의 고령 기록도 남겼다. 레이건이 재선에 도전할 당시 국정운영지지율은 평균 약 55%로 아이젠하워와 닉슨에 이어 세 번째 높았다. 1984년 재선 도전 당시의 캠페인 광고 제목은 ‘미국은 다시 아침이다 (Morning in America)’이다. 광고전문가 Hal Riney가 제작하고 직접 녹음까지 한 것이다. 물론 제임스 베이커(비서실장), 마이클 디버(부비서실장, 정치・전략담당), 마가렛 터트와일러(정무・전략담당고문), 마이클 맥마누스(커뮤니케이션담당 고문) 등 최강의 ‘기획팀’이 이끈 성공한 국정운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84년 레이건의 캠페인 광고>

Morning in America :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남녀가 일하러 갈 것이다. 이자율이 1980년 기록적인 최고치의 약 절반에 달하는 상황에서 이제 거의 2천 가구가 지난 4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신규 주택을 구입할 것이다. 오늘 오후 6천 5백 명의 젊은 남녀가 결혼하게 되며 물가상승률은 불과 4년 전 대비 절반도 되지 않아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미국은 다시 아침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지도 아래 미국은 더 자랑스럽고 강하고 더 나아졌다. 불과 4년 전 우리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표 4> 미국 대통령의 국정지지율 조사와 재선과의 상관관계 (단위 : %)

1기 평균 최고/최저 재선 당시 차기 선거 평균
트럼프 40.4 49-34 43.3 패배 41.1
오바마 49.0 68-38 48.3 낙승 47.9
조지 W. 부시 63.2 90-25 50.3 신승 49.4
클린턴 49.0 73-37 56.4 낙승 55.1
조지 HW 부시 61.9 89-29 35.2 완패 60.9
레이건 50.0 74-35 55.1 압승 52.8
카터 47.0 74-28 36.0 완패 45.5
포드 46.3 73-36 46.0 패배 47.2
닉슨 56.5 67-24 57.0 압승 49.0
린든 존슨 70.3 79-34 48.0 압승 55.1
케네디 70.7 83-56 (57.3) (사망) 70.1
아이젠하워 69.0 81-47 69.0 압승 65.0
트루먼 28.1 87/22 31.3 불출마 45.4

※ 출처 : US갤럽에서 데이터 추출 / 단, 포드는 닉슨 사임으로 승계(1974~77년) / 트루먼은 1948년 대통령 당선 이후 지지율만 계산 / 분기 지지율 평균임

 

한편, 2기 대선 도전 당시 지지율이 30%대였던 트루먼은 출마 자체를 포기했다. 역시 지지율 불과 30%대였던 카터(36%)와 조지 HW 부시(35.2%)는 재선에 실패했다. 포드는 2차 대전 이후 재선에 도전한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은 1기 평균 지지율을 보유하고 도전에 나섰으니 낙선은 불을 보듯 뻔했다. 특히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는 상당히 높은 평균 지지율 61.9%를 유지했으나, 대선을 앞둔 3개월 지지율 평균이 고작 35.2%에 불과해 재선에서 보기 좋게 낙선해버렸다. 이처럼 국정지지율은 국정운영에도, 차기선거에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정권재창출이나 중간 선거에 적용 가능하다)

 

<표 5> 한국 대통령의 국정지지율과 정권재창출과의 상관관계 (단위 : %)

당선 득표율 최고/최저 최고 최저 정권재창출
노태우 36.6 57-12 1년 2분기 3년 1분기

4년 2분기

성공
김영삼 42.0 83-7 1년 2・3분기 97.2분기 실패
김대중 40.3 71-26 1년 1분기 4년 2분기 성공
노무현 48.9 60-12 1년 1분기 3년 4분기 실패
이명박 48.7 52-21 1년 1분기 1년 2분기 성공
박근혜 51.6 60-32 1년 3분기 4년 3분기 탄핵
문재인 41.1 81-35 1년 1분기 5년 1분기 실패
윤석열 48.6 50- 50

※ 한국갤럽 기준, 분기별 평균 / 차기대선 이전 조사 한정 / 박근혜는 탄핵정국(12%) 제외

 

(2) 인사도 기획이 필요하다

 

인사는 정무 활동의 일환 : 인사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인사는 곧 정무 활동의 일환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국민에게 가장 손쉽게 보여 지는 메시지가 바로 인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사를 단순한 운영이나 관리 차원으로 이해해서는 대단히 곤란하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기획을 통하여 배치하고, (사후) 평가해야 한다. 유럽 선진국의 경우, 성 평등 내각이나 소수자 또는 특정 어젠다에 관한 전문가 발탁 등 정부가 국민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인사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주 보편적이다. 실패한 트루먼은 백악관 인사실 인원을 단 1명으로 운영했으나, 레이건의 경우 100명으로 운영함으로써 인재를 널리 구하는 노력을 실질적으로 벌였다. 그리고 많은 성과를 냈다.

 

정권을 재창출하면 곧 성공한 정부이다. 노태우 정부의 청와대 정책 분야 핵심 참모를 살펴보면 비서실장, 경제수석, 외교안보수석 전원이 폴리페서가 없다. 교수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일정 기간 행정 경험을 쌓도록 하여 조직관리 능력을 점검한 후에 인사를 단행한 특징이 있다. 즉 기획 인사가 그것이다. 초대 외교안보수석(장관급) 김종휘(국방대학원 교수)‘9112월에 임명했는데, 정부 출범 당시는 안보보좌관(차관급)으로 발탁해 일종의 수업 기간을 갖도록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6·29선언 완성에 참여한 서울대 교수 노재봉을 ’8812월 정치특보(장관급) 자리를 신설해 발탁했다. 노 특보는 중간평가 위헌론을 제기하는 등 통치행위 가운데 정치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는 2대 비서실장을 맡아 교수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빼어난 현실주의적 접근 방법과 권위형 리더십을 발휘해 권한 위임형이었던 노태우 대통령을 잘 보좌했다. 관료형에 가까운 그는 이후 국무총리로 영전한다. 앞에서 소개한 김학준 사회담당보좌역 역시 서울대 교수 출신이지만, 12대 의원과 민화위 총괄 간사를 역임한 실무력 갖춘 인물이었다.

 

<표 6> 김영삼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과 내각의 행정경험 무 경력자 현황

직위 이름 경력 비고
경제수석 박재윤 서울대 경제학 교수
외교안보 정종욱 서울대 외교학 교수
교문수석 김정남 재야운동가, 민주일보 논설위원
농수산 최양부 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

농림부장관 자문관

1993년 12월 임명
정책기획수석 박세일 서울대 법대 교수 1994년 12월 임명
통일부총리 한완상 서울대 사회학 교수
외교부장관 한승주 고려대 정치외교학 교수
농림부장관 허신행 농촌경제연구원 원장

※ 출처 : 데이터정경연구원(2022) / 노태우 정부는 안보보좌관을 1991년 12월 외교안보수석으로 개편

 

<표 7> 노태우-김영삼 정부 초대 비서실장·정책참모의 경력 비교

대통령 노태우 김영삼
직위 초대수석 경력 초대수석 경력
비서실장 홍성철 총리 비서실장, 정무수석

내무·보사부장관

평통 수석부의장

박관용 이기택의원 비서관

4선 의원

14대 대선 홍보대책위원장

경제 박 승 한국은행 조사부(금통위원)

중앙대 경제학교수

박재윤 서울대 경제학교수
외교안보 김종휘 국방대학원 교수

대통령안보보좌관

정종욱 서울대 외교학교수
정책기획 박철언 검사, 청와대 정무1비서관

안기부장 특보

박세일 서울대 법대교수

※ 출처 : 데이터정경연구원(2022) / 노태우 정부는 안보보좌관을 1991년 12월 외교안보수석으로 개편

 

YS의 문민정부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특히 인사에 실패했는데 주된 이유가 준비되지 않은 폴리페서를 다수 썼기 때문이다. 전임 노태우 정부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청와대와 내각에 즐비했던 이 폴리페서와 아마추어들이 실패를 주도했다. 금융실명제 추진에는 서울대 교수 출신 경제수석(박재윤)이 제외되고 경제기획원·재무부장관이 대통령과 함께 했다. 초대 정책수석을 대체한 초대 교뮥문화수석에는 김정남을 임명했는데, 그는 재야 출신으로 행정이나 선거·정치 분야 경험이 전무(全無)했다. 1994년 어렵사리 신설・개편한 정책기획수석에는 초대 박세일과 2대 이각범이 연달아 기용됐다. 이들은 행정 경험이 전혀 없을뿐더러 정책기획 등을 위한 ‘관계부처 업무 조정’ 능력은 더더욱 미지수인 서울대 교수 출신들이었다. YS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해양수산부 설치를 위해 1993년 연말 청와대에 농수산수석을 신설했다. 그러나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연구원과 부원장으로 잔뼈가 굵은, 그리고 잠시 농림부장관 자문관을 맡아 우루과이라운드 농업협상대표단에 참여한 최양부를 엉뚱하게 임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교안보팀은 최악이었다. 외교안보수석(정종욱, 서울대교수), 통일부총리(한완상, 서울대교수), 외교부장관(한승주, 고려대교수) 3명을 전원 교수로 임명하는 아마추어리즘의 극치를 보였다. ‘인사가 만사다’라고 말한 김영삼은 결과적으로 인사를 망사(亡事)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김대중의 1기 청와대와 실패한 김영삼의 1기 청와대를 비교하면 역시 뚜렷하게 구분이 된다. <표 6> 인사기획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윤석열 정부에 바란다-출범 100일을 앞두고>

용산은 정치의 중심에 서라 I 서론 : 윤석열 정부 탄생의 의의와 한계
용산은 정치의 중심에 서라 II 국정운영에 관한 기획이 필요하다
용산은 정치의 중심에 서라 III 통치의 핵심은 정무, 정무에 충실하라
정책플랫폼 재정립이 필요하다 Ⅰ서론: 무엇이 문제인가?
정책플랫폼 재정립이 필요하다 Ⅱ 지피지기知彼知己 실패-1987년 이후 최약체 정부의 과감•무모한 행보
정책플랫폼 재정립이 필요하다 Ⅲ 문제 해결의 킹핀-정책플랫폼
정책플랫폼 재정립이 필요하다 Ⅳ 무엇을 할 것인가?
초심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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