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역사가의 낭만-강만길의 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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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승기

 

-한반도를 일본으로부터 분리한 조치는 결코 연합국이 조선병합을 침략으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무효’ 부분은 한국과 일본이 해석을 달리할 것이 예정된 이른바 ‘불합의의 합의’에 해당한다.

-이왕가로 격하되었다 하나 순종 직계는 천황가의 일족인 왕족으로, 형제들은 공족으로 대접받았다.

 

 

어느 역사가의 낭만

 

강만길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역사가의 인식에 갸우뚱할 때가 많다.『강만길의 내 인생의 역사공부』라는 얇은 책에서도 그랬다. 강만길 선생은 2005년 4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반민특위’ 이래 가장 폭압적인 영향력을 발동한 위원회였지 싶다.

 

강만길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역사가의 인식에 갸우뚱할 때가 많다.『강만길의 내 인생의 역사공부』라는 얇은 책에서도 그랬다.

 

“1910년의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에 대해서도 박정희 정부는 그것이 체결된 당시부터 이미 무효라 ‘이해’하고, 또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우리 민족사회가 그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부터 ‘한일합방조약’이 무효가 되었다고 이해하는 서로 다른 애매한 상황에서 한일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때 미국 중심의 연합국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청일전쟁으로부터 빼앗은 대만은 중국에 돌려주고 러일전쟁으로 빼앗은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땅은 소련에 돌려주었습니다. 우리 땅도 일제강점 아래에서의 주민들의 노예상태 운운하면서 패전한 일본영토에서 떼어내어 일정한 절차를 거쳐 독립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곧 연합국들이 일본의 우리 땅 지배를 침략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박정희 정부는 한일협정 과정에서 그것을 밝히지 못하고 말았으며 … ”(『강만길의 내 인생의 역사공부』, 창비, 2016. 128, 129쪽).

 

2차대전 후 일본에서 ‘한반도의 분리’는 병합조약의 불법성과 무관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일본의 식민지이던 대만은 장개석 정부에게 귀속되고, 사할린 땅은 소련에게 돌아갔다. 중국은 일본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고, 소련은 잠깐 발만 담갔으나 어쨌든 일본과 교전한 ‘승전국’이었다. 중국과 소련은 승전국의 전쟁배상으로 종전 영토를 회복한 것이다.

 

한반도를 일본으로부터 분리한 조치는 결코 연합국이 일본의 조선병합을 침략으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패전국 일본에 개전에 대한 책임을 묻고 일본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식민지 조선을 분리하였을 뿐이다.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의 해석

 

1965년의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It is confirmed that all treaties or agreements concluded between the Empire of Korea and the Empire of Japan on or before August 22, 1919 are already null and void)”고 규정한다.

 

이 규정의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 부분은 한국과 일본이 해석을 달리할 것이 예정된 이른바 ‘불합의의 합의(agree to disagree)’에 해당한다. 한국은 1910년 병합조약 체결 당시부터 그 조약이 당연 무효인 것으로, 일본은 1945년 8월 15일까지는 유효했고 1965년 기본조약 체결 시점에서 비로소 무효인 것으로 해석해 왔다.

 

즉, 한일 양국이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여부에 대해 각자 완전히 다른 입장이라는 사정을 전제로, 각자 국내적으로는 원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것을 예정한 규정인 것이다.

 

병합조약의 체결 경위

 

한국은 병합조약 당시까지도 국제조약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국가였다. 1882년 조선의 최초 근대조약이라 할 수 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약문은 미국의 슈펠트 제독(Commodore Robert W. Schufeldt)과 청국의 이홍장(李鴻章) 사이에서 만들었다. 조문화 작업(drafting)은 청국의 프랑스 유학파 마건충(馬建忠)의 역할이었다. 1882년 5월 14일 신헌과 김홍집이 텐진에서 도착한 정여창·마건충의 청국 군함에 올라 베이징을 향하여 삼궤구고도례(三跪九叩頭禮)를 행했고, 이홍장과 슈펠트의 초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Ⅱ』, 아산서원, 2018, 347,348쪽). 1882년 미국 해군이 발행한「Flags of Maritime Nations」에는 이날 슈펠트가 넘겨받은 태극기의 도안도 실려있다(「동북아역사재단뉴스」 2022 August Vol. 189, 05쪽).

 

1882년 6월 6일 마건충의 중재로 조·영수호통상조약이 맺어졌다. 내용과 형식은 조·미수호통상조약과 판박이였다(『한국 사람 만들기 Ⅱ』, 350쪽).

 

국내에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의 비준서에 순종황제의 서명이 없다느니 어쩌니 하며 조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유행했다. 제국 일본의 대한제국 폐멸은 군사력에 의한 불법점령, 곧 ‘강점’이었다는 인식도 일반적이다(정재정, 『교토에서 본 韓日通史』, 효형출판, 2010, 273쪽). 박은식의 1910년대 저술인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도 ‘군사강점’이라는 서술이 보인다(정재정,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역사비평사, 2014).

 

한편, 을사조약 체결 6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외무성 기밀비 10만원을 집행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되는 외무성의 기밀문서에서는 ‘2만원을 황제 수중에 납입시키고 나머지를 이하영(법부대신), 이완용 등에게 나누고 잔액 금 39,000원을 반납한다’는 기록이 확인된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3권 11, 보호조약 1~3(195) 「임시기밀비지불 잔액반납의 건」, 1905년 12월 11일).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 군주들은 흔히 평민으로 신분이 바뀌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었다고 하나, 순종의 직계는 천황가의 일족인 왕족(王族)으로 그 형제들은 공족(公族)으로 대접받았다. 舊황실은 총독부 예산에서 세비(歲費)를 받았는데, 식민지 세출의 2%가 조선인의 10만분의 1에도 미치지 않는 舊지배층에게 갔다(박종인, 『賣國奴 高宗』, 와이즈맵, 2020, 346,347쪽).

 

사정이 그러하지만, 국내에서 병합조약을 무효로 파악하고 우리끼리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방적 주장이 국경을 넘어가고 이미 체결된 조약의 효력을 건드리는 시도라면 백해하고 무익할 뿐이다. 그것이 ‘불합의의 합의’로서의 ‘이미 무효’의 해석론인 것이다.

 

[출처] 어느 역사가의 낭만 | 작성자 홍승기 변호사

**작성자의 허락을 얻어 모셔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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