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학생이 우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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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태

 

미국의 교육자들은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화의 주어와 목적어가 학생이다.

한국 공교육은 거의 완벽하게 무너져 있고 학교가 공부하는 곳인지 조차 불분명하다.

교육에서 모든 논의의 시작과 끝은 학생의 후생과 교육 효과가 되어야 한다.

 

 

[교육은 학생이 우선해야 한다. 윤정부 교육 개혁안이 의심받는 이유]

 

내가 미국과 한국의 교육에 종사해 오면서 느꼈던 가장 큰 차이는 어느 나라나 교육의 성과에 대한 비판과 회의는 크지만 학생들이 미국 학교를 좋아하는 이유는 미국의 교육자들은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화의 주어와 목적어가 학생이라는 점이다. 즉 교육자들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확고하게 학생 중심의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위해, 교육적 성과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나가 내가 경험한 미국의 교수회의의 주제였다,

 

우리 딸은 어려서 지나칠 정도로 독서광이였다. 마을 도서관의 책과 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내고 있었고 책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우리 애가 미국의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학부모 면담에서, 담임 선생님이 우리 애의 독서에 대한 걱정을 논의하자고 했었다. 우리 딸은 어려서 지나칠 정도로 독서광이였다. 마을 도서관의 책과 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내고 있었고 책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딸애의 독서 이해력은 대학생들 수준을 넘지만 정서적으로는 역시 초등학생이라서 읽어야 할 책과 읽지 말아야만 책을 구분해 주라는 권고를 내게 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미국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내가 읽어본 책들도 아니고 해서 (미국에는 우리가 아는 고전으로 독서를 시작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골라줄 능력이 안된다고 대답했다. 딸애의 책 읽는 속도를 감안하면 내가 먼저 읽어보고 딸애에게 건네준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알았다고 말하더니 내놓은 해법이 본인이 본인 집 근처의 대학 도서관에 가서 일주일에 한 박스씩 책을 골라 가져와서 딸애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져서 딸애는 그 책들을 읽고 박스에 돌려 놓으면 담임 선생님이 다음 박스를 가져다주는 식이었다. 그해 딸애는 담임의 지도하에 시를 써서 출판사가 좋은 시를 묶어서 인쇄해주는데 당첨이 되고, 200페이지가 넘는 판타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딸애를 5학년 때에 데리고 한국에 와서 집 근처의 사립학교에 집어 넣었었는데 놀랍게도 수학 숙제가 니가 학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제집을 5페이지씩 풀어 오라는 것이었다. 한국어가 서투른 딸애는 밤을 새우다 시피하며 나의 번역의 도움을 받아 숙제를 해서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참 잘했어요의 도장 뿐이었다. 학생마다 다른 문제집을 풀어오는데 담임 선생님이 그것을 일일이 체크하고 피드백 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자란 딸애의 기대는 선생님이 자신이 무엇을 맞고 틀렸는지 그래서 무엇을 더 공부해야 하는지 피드백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딸애의 실망과 혼란은 계속되어 하루는 학급 동기생들 사이의 분란에 담임 선생님이 엉뚱한 학생을 야단치는 것을 목격하고 딸애가 손을 들어 내가 분란을 일으킨 학생이 누구인지 고자질할 수는 없지만, 지금 야단치고 있는 그 학생은 억울한 경우라는 것을 말했다고 한다. 담임은 너는 입 닥치고 있으라고 소리를 쳤고 한국어를 직역하는 딸은 선생이 학생의 발언에 “shut up”이라는 딸애 기준으로 “막말을 하고 감정 처리를 못하는” 선생님에 놀라서 당신은 선생 자격이 없다는 항변을 하고 학교를 나와 버렸다. 울면서 전화를 했고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우리 선생님은 성냥공장 노동자의 자격도 없다고 내게 항변했다. 그 당시 미국에서 뒤늦게 박사과정 중인 아내는 아들을, 나는 KAIST에 먼저 와서 첫째인 딸애를 데리고 이산가족으로 딸애의 한국 적응을 돕는 미션을 수행 중이어서 학교로 달려갔다.

 

나를 만난 담임 선생님의 첫 마디는 우리 딸애의 걱정이 아니라 우리 딸애가 그렇게 학교를 뛰쳐나가면 교장 선생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겠나는 항의였다. 나는 아무 말도 더할 기력이 없었다. 그런 좌충우돌이 몇번 있었고 나는 결국 딸애를 엄마에게 돌려보내, 아내는 애 둘을 데리고 양육하면서 박사학위를 하는 독한 엄마가 될 수 밖에 없었고, 한국에 귀국해서도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애들을 한국학교에서 교육하는 것을 포기하고 외국인 학교로 전학시켰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은 고생을 하고 수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학부모로 경험한 오늘의 한국 초중등 교육에서 공교육은 거의 완벽하게 무너져 있다는 것이고 학교가 공부하는 곳인지 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 아들은 당시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학원을 다니지 않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초중등 교육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학교육도 교수들, 학교 보직자들의 마음에 교수의 이해보다 학생들의 교육적 이해가 우선하고 있느냐는 의심을 나는 나의 보직 경험을 통해 미국에서의 교수 생활과 비교하면서 학생들에게. 속으로 미안해한 적이 자주 있다.

 

이런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교육에서 학생이 없는 정책과 교육의 문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5살 조기 입학, 외국어 고등학교 폐지 등의 아이디어에 학생이 있느냐는 점이다. 학생이라는 추상적인 집단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인 다 개성적인 개인으로서 학생이 대접받고 교육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설프게 발표된 정책들은 그런 설명이 없다.

 

나는 학교를 5살에 하든 6살에 하든 하는 것이 교육 개혁의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지극히 회의적이다. 학교가 학생들이 즐겁게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공부는 학원에서 하고, 학교는 애들 길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게 낮에 가두어 두고 관리하고, 시험으로 성적 순위 정하고, 대학 가야 하니 학교에서 학적부도 있어야 하니, 제도가 보장하는 독점력이나 행사하는 기관인 것이 현실이라면 교육을 학교에서 복원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교육을 포기한 교육기관에 한 살 일찍 시작하는 말든 뭐가 달라지겠는가? 교육이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니 학부모들이 5살 입학을 하면 3살부터 학원 교육을 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걱정을 한다. 이게 문제의 본질이다.

 

문제의 본질은 제쳐두고 형식을 바꾸어 봐야 교육의 효과는 없는 것이다. 나의 한국의 초중등 교육의 경험은 이미 20년 전의 것이다. 우리 애들이 문화적 적응력이 낮고 나를 닮아 고집이 센 애들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그 모습이 지금도 유지된다면 지금 정부의 교육부가 내지르는 교육 개혁안들은 엉뚱한 다리를 긁는 짓들이다.

 

교육에서 모든 논의의 시작과 끝은 학생의 후생과 교육 효과가 되어야 한다. 학부모의 불편, 교사의 저항, 경제적 효과 등은 아주 부차적인 것들이다.

 

논의도 없이, 2025년에 시행하겠다고 불쑥 내밀고 엄마들이 난리가 나니까 대통령실은 국민의 협의 없이 할 수 없다고 하고, 이래서는 안된다. 인수위의 계획에도, 대통령 공약에도 없던 것들이 자신들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일들이 대통령 독대하면 뭔가는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야 되어서 내지르는 것처럼 발표하기에는 교육의 제도는 훨씬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요즈음 애들이 전보다 더 미디어에 일찍 노출되어 똑똑해 보인다고 교육의 수용 능력까지 향상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조기 교육은 뇌의 학습능력보다도 정서 발달과, 집중력 범위(attention span), 교우들과 어울리며 배우는 사회성 발달 등의 다른 요소들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교육이 전문직이다. 애들의 말이 빨라진다고 정서도 사회성도 빨라지는 것 아니다. 사회성을 배우기 어려운, 한 집에 하나뿐인 애들이라는 환경도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은 수렵시대부터 생물학적으로 변화한 것은 지극히 적다.

 

앵무새도 사람 말을 따라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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