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63주기 추모제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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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대환

 

죽산 선생님께서는 공산당을 탈퇴하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6∙25 때 한국이 적화되지 않은 데에는 죽산 선생님의 공이 있습니다.

죽산 선생께서는 간첩이란 누명을 반세기 동안 둘러쓰게 되었습니다.

 

 

죽산 63주기 추모제를 마치고…

 

역대 가장 감동적인 인사 말씀을 해주신 이모세 회장님을 비롯한 참석자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오늘 세 번째 추모사를 해 주신 윤준수 씨는 2000년생으로 죽산과는 101세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더욱 뜻깊고, 감사합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 63주기에 부쳐

 

윤준수(전북대 정치외교학과 학생)

 

삼가 죽산 선생님에 대해 추도사를 하려니 떨립니다. 그리고 제 가슴에는 죽산 선생에 대해 존경심이 솟아오릅니다. 죽산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절 3∙1운동과 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셔도 독립 정신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9년 넘게 감옥살이 하는 그 모진 고생 끝에, 마침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죽산 선생님께서는 박헌영 일파의 조선공산당에 대해 정중한 어조의 편지를 썼으나 조선공산당은 죽산 선생님의 고언을 듣지 않자, 선생께서는 공산당을 탈퇴하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1948년 제헌 국회에 참여하는 선택을 하십니다.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일부 진보 분들은 죽산 선생님의 선택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1948년 제헌 국회에 참여하는 선택을 하십니다.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일부 진보 분들은 죽산 선생님의 선택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나 우사 김규식 선생처럼 선거에 불참하셨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들처럼 선거에 불참했다면 제헌국회 선거는 이승만 박사와 한민당 잔치판이 되었을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자서전에서 백범 선생이 제헌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 박사를 견제해야 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 말씀처럼 백범 김구 선생이 선거에 참여 안한 것은 큰 과오라고 생각합니다.

 

죽산 선생께서는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후 나중에 이승만 정부에 농림부장관 직을 제안 받고, 죽산 선생께서는 이를 수락합니다. 어떤 분들은 분단된 정부에서 그것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장관직을 하냐며, 죽산 선생님이 장관을 맡은 것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산 선생님이 내각에 참여한 것은 ‘신의 한 수’입니다.

 

누구나 평가가 다를 수도 있지만 1948년에 수립된 정부는 당시 국민 대다수가 참여한 5∙10총선으로 선출된 제헌의원들이 만든 합법적인 정부였습니다. 오히려 죽산 선생께서 내각에 참여 안 했다면, 농지개혁법은 제대로 실행이 안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농지개혁법을 실시합니다. 농지개혁법은 정말 혁신적이었습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 농민들은 드디어 내 땅을 가지게 되었다고, 돌려받을 수 있다고 기뻐했으며, 이것 덕분에 6∙25전쟁 때 농민들이 북한정권에 협력을 안 하였습니다. 6∙25 때 한국이 적화되지 않은 데에는 죽산 선생님의 공이 있습니다.

 

죽산 선생님께서는 재선에 성공하신 뒤 6∙25전쟁이 발생합니다. 죽산 선생님께서는 피신하시지 않고 오히려 국회 문서를 소각하고, 중요한 것은 챙기느라 피난을 늦게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불행하게도 김조이 여사를 인민군에 의해 납북 당하는 불행한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죽산 선생님께서는 그 와중에서도 장택상 전 수도경찰청장이 유엔 특사 차 갈 때 가족을 돌봐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랑 장택상은 감동해 조봉암 선생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1952년 발췌개헌이 이루어진 후 죽산 선생님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항하기 위해 초대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합니다. 이 때부터 죽산은 이승만 정부에 찍히기 시작했습니다. 죽산 선생께서 발췌개헌에 찬성했다고 비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는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 후보로 나가서 당당하게 경쟁한 죽산 선생의 노선이 옳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죽산 선생께서는 재출마해서 해공 신익희 선생과 단일화를 협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공 선생께서 익산에서 서거하시고, 그렇게 죽산 선생은 야당 단독 후보가 되었습니다. 당시 자유당에서 무소속 조봉암 선거운동원을 폭행하기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죽산 선생께서는 30% 넘게 득표를 하였습니다. 저는 죽산 선생께서 30%가 아닌, 훨씬 더 득표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 후에 죽산 선생께서는 최초의 혁신 정당인 진보당을 창당합니다. 그러나 자유당 정부는 죽산 선생을 가만히 두지 않고 결국 누명을 씌워 법살합니다. 당시 초대 내각 때 내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을 지낸 창랑 장택상과 윤치영은 이 판결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창랑 장택상은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홍진기한테 죽산 선생의 사형을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죽산 선생께서 법살된 날, 장례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경찰들이 막아서 못 갔다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산 선생께서는 간첩이란 누명을 반세기 동안 둘러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11년 마침내 대법원은 죽산 선생의 52년 전의 유죄 판결을 만장일치로 파기하였습니다.

 

저는 죽산 선생을 보면 볼수록 정말 위대하신 위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농지개혁법은 최고의 법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저는 죽산 선생을 보면 볼수록 정말 위대하신 위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농지개혁법은 최고의 법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좋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죽산 선생이 아니었으면 처음 치르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단독 후보, 무투표 당선으로 진행될 뻔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도 유아사망에서 살려놓으셨습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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