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지켜보고 행동으로 말씀하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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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광조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에서는 감정 드러내는 아버지 적어

-애정 표현 방법을 보고 배우지 못한 아버지는 자식에게 애정 나타내는 데 어색해

-가끔 부모님 대접하며 스스로 뿌듯했고 부모님도 좋아했지만 지나면 후회 남아

 

 

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뒷모습이 떠오른다. 웃으면서 나를 본 날이 더 많고 마주보며 이야기한 날도 많다.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따라 드렸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은 뒷모습이다.

암으로 투병하던 중 가족이 다 모여 식당에 갔다. 당신이 스스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자손들에게 이야기를 남겼다. 유언이었다.

 

그날 손자들이 옆에서 아버지 팔 한 쪽씩 잡고 걸었다.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못했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막내 손주에게 “떼끼, 녀석은 맨 똥이야기만 하냐”고 하셨다. 어린애들은 똥 이야기를 좋아하는 때가 있다. 그렇게 웃었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걷는 모습이었다. 그 뒤 급속히 상태가 나빠지고 추석에 모든 가족이 모인 모습을 말없이 물끄러미 보고 앉아 있었다. 그날 새벽에 어머니에게서 빨리 오라는 전화가 왔다. 정신없이 운전해서 갔다. 아버지는 그렇게 떠났다.

 

아버지가 집에서 투병할 때 가끔 수액을 놔 드렸다. 혈관을 단번에 찾을 때도 있었지만, 열 번 넘게 찔렀는데도 실패한 적이 있다. 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는데,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미동도 없이 팔을 맡겼다. 아플 텐데 담담했다. 아들에 대한 믿음과 응원이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지켜보고 행동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오해를 받는다. 우리나라처럼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에 감정을 드러내는 아버지는 적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도 안 했다. 어머니 말로는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자식들 앞에서는 일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신 뒤 집도했던 은사인 교수님께 인사를 갔다. 돌아가셨고 잘 봐 주셔서 고맙다고. 교수님은 의연한 환자였다고 통증이 심했을 텐데 내색도 안 했다는 말을 했다.

 

사람이 죽을 때 걱정 중 하나가 자손들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면 어떨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죽는 과정에서 자손들에게 당당하면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중요하다는데, 아버지는 아주 품위 있게 병과 싸우고 의연하고 가셨다. 자손들 모두 지우고 싶은 기억이 없을 정도다.

 

어머니는 사랑을 다정다감하게 표현한다. 말로 하고 쓰다듬고 안부를 묻고. 하지만 아버지는 말이 없다. 지켜보고 행동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오해를 받는다. 우리나라처럼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에 감정을 드러내는 아버지는 적다.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보고 배우지 않은 아버지는 자식에게 애정을 나타내는데 어색하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섭섭하고 원망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다 자연스레 안다. 아버지는 날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표현 방법을 몰랐을 뿐이라는 것을.

 

난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나는 자식을 공부시킨다고 떨어져서 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항상 가족은 같이 살아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밥을 먹으려 나갈 때도 다 같이 나갔고 여행도 다 같이 갔다. 큰 애가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 간 뒤 한참 동안은 외식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애들을 꼭 다 챙기려 하냐고 타박했다. 애들도 자기들을 놔두고 나가라고 하고. 그래도 난 악착같이 다 챙기려 했다.

 

내가 아무리 챙겨도 애들을 금방 자란다. 품을 떠난다. 그 시간은 반드시 온다. 그래서 더 같이 하려고 욕심을 냈다.

 

자라면서 부모님에게 많이도 대들었다. 속도 많이 썩였다. 아버지와는 몇 년간 필수적인 대화만 했다. 말을 걸어도 피했고, 한 자리에 있기를 거부했다. 그때는 그랬다. 내 삶에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는 삶에 없었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다. 퇴근하고 오시면 아버지는 안방에 있고, 나는 늦게 들어와 내 방에 틀어박혔다. 아침이면 아버지는 출근하고, 휴일에는 내가 밖으로 나다니고, 만날 일도 적고 만나도 어색했다.

 

부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했던 대화보다 독립한 후 가끔 부모님 집에 가서 했던 대화가 훨씬 많다. 마주보며 밥을 먹은 횟수도 독립한 후에 먹은 횟수가 많을 정도다.

 

가끔씩 자식으로 부모님을 대접하면서 스스로 대견하고 효도하는 기분도 들었다. 부모님도 무척 좋아하셨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지나면 후회가 짙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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