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그들만의 리그: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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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산

 

-군포조차 내지 않은 양반들. 전쟁으로 나라 망할 지경인데도 의병 활동 기피

-조선 후기 양민 천민도 신분 세탁하면서 족보 위조, <목민심서> 소개될 정도

-지역 차별이 조선시대 관통해 지속된 건 왕들의 과단성과 지혜 부족했던 탓

 

 

노블레스 노블리주(Noblesse Noblige)

 

대한민국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조상이 상민이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대부분 양반집 자손인 셈이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10%대였던 양반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 70%를 상회하니 틀린 말이 아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공명첩의 남발이나 돈을 주고 신분을 세탁하는 일이 성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보편적인 역사관에서 보더라도 참 특이한 존재들이다. 서양의 귀족들은 평시에 호의호식하며 특권을 누리지만, 나라가 요구하면 사지(死地)를 마다않고 나가서 목숨을 버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이다.

 

그런데 조선의 양반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좋은 것은 다 챙기고, 군역도 면제되었다. 그들은 가진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군포조차 내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서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천민들과 같이 할 수 없다는 핑계로 의병 활동조차 기피했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조차도 “선비정신” 운운하면서 조선의 양반을 받드는 것을 보면, 시대 퇴행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을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랑하는 경북의 어느 도시는 지금도 “양반 정신을 한국 정신문화”라고 떠받들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재단’도 그 도시에 있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물론 사재를 털어 의병 활동을 하고, 양반 신분을 버리고 중인들이나 하는 의술이나 천문학에 몸담았던 사람들도 있었고, 자신과 가문을 생각하여 복지부동하는 비겁한 선비들 속에서 초개와 같이 떨치고 나서서 목숨을 걸고 임금이나 권력자의 잘못을 성토하거나 백성의 편에 서서 대동법 시행 같은 정책에 혼신을 다한 선비들도 물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퇴락한 집안의 양반들은 물론, 양민과 천민 들도 신분을 세탁하면서 족보를 위조하였다(사진 속 전주 류 씨 족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가짜 양반들; 족보 갈아타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각 고을마다 다양한 본관을 둔 성씨들이 기재되어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힘있는 명문 대성으로 갈아탐으로써 마침내 숱한 성씨와 본관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족보 문화도 변화하였다.

 

족보는 1476년 <안동권씨성화보>가 처음 만들어졌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퇴락한 집안의 양반들은 물론이고 양민, 천민들도 신분 세탁을 하면서 족보를 위조하였는데, 다산의 <목민심서>에도 당시의 족보 위조 방법이 소개될 정도로 성행하였다.

 

그리고 초기에는 족보에 남녀가 차별없이 기록되었는데 18세기 이후로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만 기록되게 바뀌었다.

 

조선 선비 사회의 중요한 신분 제도 상의 특징은 서얼 차별이다. 서자나 얼자라 해서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 태어난 점에서는 적자와 다를 바 없는데도, 기득권 고수를 위하여 이들을 차별하여 과거 응시 자격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능력을 사장시켜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최서’의 장원 사례이다. 성종 때 별시를 시행했는데, 갑자기 과거 시험을 본다는 방이 붙자 유생들이 우르르 몰려 과시장에 난입하는 바람에 일일이 호명하고 사람을 대조하는 ‘점명’을 할 수 없었다.

 

그 혼란을 틈타 과시장에 들어간 최서가 채점 결과 장원으로 뽑혔는데, 최서는 얼자 출신임이 밝혀져 응시 자격이 없는 자가 장원을 했다 하여 논란이 되었고, 성종도 고민하였으나 결국 재주를 높이 사서 벼슬길을 허락하였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세종 때 이형기, 성종 때 구종직, 중종 때 반석평, 고형산 등 여러 예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서얼에게도 공적으로는 과거 응시의 길을 열어 주었지만, 집안이나 족벌의 명분으로는 차별이 더 공고해져서 족보에 서얼 자손은 따로 명기하고, 혼인에서도 적서를 가려서 하는 등 자기들만의 리그를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양반들 자기네 좋자고 축첩 제도를 인정해 놓고 서얼을 차별했다. 이는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서얼 차별 못지않게 심한 차별을 나타낸 것이 지역 차별이다. 북도 출신에 대한 차별이 조선시대 내내 시행되었다.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기 어려웠고,간혹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미관말직에 머무르는 정도로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차별이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지속된 것은 왕들의 과단성이나 지혜가 부족했던 탓이다.

 

명나라 주원장의 사례를 보자. 과거 시험에서 합격한 52명이 전부 남방 출신으로 채워지자 재시험을 치르도록 명하였는데, 재시험에서도 편향성이 고쳐지지 않자, 시험관과 수석 합격자를 처형하고 전원 북방 출신만으로 합격시켰다.

 

이후 세월이 흘러서도 남방의 과점 현상이 시정되지 않자, 남부 55, 북부 35, 중부 10으로 하는 지역 비율제를 마련했다. 이런 과단성이나 고민, 노력이 조선 왕들에게는 없었다는 점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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