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은 권력이다』의 관점에서 본 메타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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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자

 

세대전체가 완벽한 컴퓨터 네이티브인 MZ세대에 최적화된 플랫폼 메타버스

기술 발전할수록 성희롱에 더 무방비 노출, 한층 더 가혹한 감시 사회 우려돼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게 형체 없는 것인데, 테크놀로지 덕분에 실제라 믿어

 

 

『시선은 권력이다』를 처음 썼을 때는 고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나오는 ID 카드와 CCTV 정도가 전자 판옵티콘의 문제였다. 14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무섭게 바뀌어, 이젠 칩을 피하 이식하는 기술까지 논하는 시대가 되었다. 2022년 새해 현재 전 세계의 관심사는 온통 메타버스다.

 

페이스북은 아예 사명을 ‘메타’로 바꿨고, 한국에서도 회사 CEO가 메타버스만 언급하면 주가가 뛴다고 한다. 메타버스란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친 말로,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를 뜻한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의 요소로 되어 있지만 기존의 가상현실보다 더 확장된 개념으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아바타를 통해 가상현실 안에서 취업박람회도 가고, 회사 연수에도 참여하고, 명품 쇼핑도 하고, 편의점 테라스에서 커피도 마신다. 사람들과 상호 소통하는 행위들을 그대로 가상공간 안에 옮겨놓은 것이다.

 

메타버스는 MZ세대에게 최적화된 플랫폼이다. 1980년에서 2012년에 출생한 이 세대는 숫자는 미미하지만 소비를 선도하는 세력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이다. 세대 전체가 완벽한 컴퓨터 네이티브이고,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세대인데,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은 그 자체가 메타버스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실에서는 비싸서 사지 못하는 명품 브랜드 자동차와 옷을 가상 세계의 ‘또 다른 나’에게 입혀주거나 경험하게 해 대리 만족을 느낀다.

 

『시선은 권력이다』의 증보 수정판 업데이트를 위해 메타버스를 좀 살펴보니, 메타버스는 기술이 더 발전하면 할수록 성희롱에는 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사람들에 대한 권력의 감시는 더 철저하게 되어 한층 더 가혹한 감시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측면이 있었다.

 

<사진> 위는 MCM, 아래는 구찌 메타버스 화면.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성찰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 부분을 한 번 옮겨 보면,

 

가상현실은 플라톤 이래 오래 동안 철학자들이 제기했던 “세상이 실재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나?”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실재라고 알고 있지만, 플라톤은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 동굴 벽에 투사된 그림자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은 진짜 현실이 아니라 신(神) 혹은 누군가가 가짜로 한 번 만들어 본 시뮬레이션, 즉 가상현실이라는 것이다. 2,450여 년 전에 살았던 플라톤의 상상력은 고작 동굴 벽 그림자에 머물렀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의(模擬) 가상현실(simulated reality)이 컴퓨터의 정보 단위 바이트(bytes)로 구현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마치 영화 <트루만 쇼>처럼 완전한 시뮬레이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17세기의 합리주의 철학자 데카르트도 이미 제기했던 문제였다. 그는 우선 감각은 믿을 만한 게 못된다고 했다. 똑같은 크기의 도형도 검정색이 흰색보다 작아 보이고, 똑같은 길이의 선도 화살표가 바깥으로 열려 있는 것이 안쪽으로 닫혀 있는 것보다 길어 보인다. 우리의 감각은 이처럼 우리를 속인다.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사람은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듯이 감각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좋다.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은 2+3=5 같은 비감각적 기원의 수학적 진리뿐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이것도 나를 조종하기 위해 어떤 심술궂은 악마(evil demon)가 만들어 놓은 가상이 아닌지?라고 데카르트는 짐짓 의심해 본다. 선(善)한 신은 진리의 원천이지만, 그 반대 극에 있는 심술궂은 악마는 자신의 모든 계교를 나를 속이는 데 사용하기 위해 전능하리만큼 교활하게 속임수를 쓰는 악한 악마일 것이다,라고 그는 일단 가정해 본다.

 

그렇다면 하늘, 공기, 지구, 색채들, 형체들, 소리들 그리고 내가 보는 모든 외부의 물체들이 실은 그 악마가 나의 믿음을 농락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환상과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손도, 살도, 피도, 아무런 감각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심술궂은 악마가 나의 감각을 교란시키고 나를 환상에 빠트리려 해도, 최소한 이런 허구의 가정을 하고, 이런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바로 ‘나’이지 않은가?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가정과 판단을 중단시킬 수 있는 능력도 나에게만 있다. 그렇다면 내 주변의 모든 것이 환상이나 속임수가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주체, 즉 ‘나’는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의심할 수 있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가 생겨난다. 그러니까 심술궂은 악마의 에피소드를 동원한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자기 의식의 각성을 다짐하고, 사유 주체로서의 자신감을 갖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데카르트의 그 심술궂은 악마는 21세기 지금 여기에서 테크놀로지로 탄생했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실은 전혀 형체가 없는 것인데, 테크놀로지 덕분에 나는 그것이 실제의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미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는 수천, 수백만, 수십억 개의 시뮬레이션 세계가 그것이다.

 

하기는 물리적 실재의 세계에서도 그 가장 밑바닥에는 벽돌 같은 단단한 존재가 깔려 있지 않다는 것,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실재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양자역학에서 배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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