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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미
-어린시절 남자애가 전해 준 <아서왕 이야기>의 아득한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낸 책
-융학파의 근원적 모티브 설득력 있게 제시, 현대인의 편향된 심리경향을 직접 다뤄
-이 책 통해 융심리학을 깊이 공부하고픈 의욕 갖게 돼. 융의 진지한 초대장 받은 셈
인터넷서점을 거닐다가 마주친 이 책의 제목(<왕, 전사, 마법사, 연인>)은 아득한 향수와 그리움의 냄새를 풍겼다. 왕과 전사와 마법사와 연인이라. 이들만으로 구성되고도 꽉 찬 무대는 단 하나, 켈트족 전설 속 아서왕의 궁전뿐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아서왕 이야기>를 처음 읽은 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에 선명하다. 연애한다고 말이 날까 봐, 몰래 불러내서 교사 뒷편에서 책을 건네 준 남자애. 책을 읽으며 걷던 신작로길과 산길과 논길. 집에 와서 다 읽고 나서 창호지 바른 안방문을 젖혔을 때 아직도 초가을 햇살은 깨끗하게 닦아놓은 토방마루를 비치고 있었지.
이 책은 남성의 원형을 이 네 가지로 분류하면서 시작하는데, 인생이 캐멀롯에서만 펼쳐지지 않는 현대 사회의 남성 심리를 이렇게 분류하는 게 과연 과학적 근거가 있을까?
책에는 그에 관한 명확한 해명은 없지만 저자나 다른 정신분석학파 심리치료사들의 임상 심리 경험을 소개하면서 그 경험의 총체 속에 원형의 존재를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보인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성인 남성 심리의 기본 구성요소로 네 가지 원형을 분류해 낸 심리 연구는 시카고의 칼 구스타프융 연구소의 강의에서 처음 소개되었다”고 한다. 또한 “원형의 존재는 환자의 꿈 혹은 공상과 인간에게 깊숙이 뿌리박힌 행동양식을 관찰한 많은 임상 자료에서 증명되었고 세상의 신화에 대한 심층 연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사실 인간 유형을 나누고 성격 특성을 기술하며 자아의 발전 경로를 다루는 이런 종류의 책은 계통별로 다양하다. 이슬람 수피교도로부터 발원됐다는 애니어그램이나 융학파 측에서 설계된 엠비티아이 검사도 있고 동양의 영원한 비술인 명리학, 사주팔자론도 그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어린시절부터 이런 종류의 책을 좋아했지만 읽고나서 허탈한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읽을 때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할 수 있을 듯한 인식의 기쁨을 느끼지만 책을 덮고 돌아서면 손에 쥐어진 게 아무것도 없고 잿빛 삶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 책은 “그래서 뭘 어쩌라고?”의 시빗조 의문을 품은 내게 통찰력 말고 내면의 현실을 바꾸기 위한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팁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융학파의 근원적 모티브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 주면서 현대인들의 편향된 심리 경향을 직접적으로 다루기 때문인지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융의 연구는 현대의 과학적 성취, 특히 양자물리학의 연구 성과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아다시피 현대 양자물리학은 힌두교나 도교의 직관적 통찰력과 비슷한 점이 많다.
칼 융은 처음 무의식 세계의 지도를 만들 때, 인간 심리의 에너지 흐름과 원형 패턴이 막스 플랑크의 양자물리학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에 놀랐다.

이 책을 통해 융 심리학을 깊이 공부하고 싶은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융이 진지한 초대장을 내게 보낸 것이다.
각 원형은 집단 무의식의 기저에 숨겨진 채 우리들의 생각이나 느낌, 행동, 반응의 패턴을 만들고, 우리의 개성을 구성한다고 한다. 융에게는 집단 무의식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실재하는 아원자물리학의 에너지 파장과 매우 비슷하게 보였다.
이 집단 무의식은 인류의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져 내려 온 본능적 패턴과 에너지로 구성된 것이라고 융은 생각했다.
그 원형들은 다른 동물들의 본능적 행동양식에서도 보인다. 갓 태어난 새끼오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존재를 엄마로 인식하는 것은 새끼오리의 유전자 속에 있는 ‘보호자 원형’이 활성화되어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유전자에는 인간이 ‘엄마’ 혹은 ‘아빠’, 그 외에도 많은 인간관계와 다양한 경험을 동경하도록 원형의 존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집단 무의식 속에 솟아나온 원형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어떻게 발현되는지, 특히 그림자 원형이 득세하는 역사적 경로와 그 폐해를 설명해 주어서 설득력이 있다.
특히 저자는 현대사회 가부장제 하의 왜곡된 남성성을 증오한 나머지 남성성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가학성이라고 결론 짓고 ‘에로스적인 것’, 즉 사랑, 친밀감, 친절은 오로지 인간의 여성적인 면에서만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의 견해를 논박한다.
그는 “가부장제는 심오하고 뿌리깊은 남성성의 표현이 아니다. 진정한 남성성이란 가학성과는 거리가 멀다. 가부장제는 소년 심리의 표출이며, 부분적으로는 남성성의 어둡고 광적인 면일 뿐으로 , 성장을 멈춘 채 미숙한 단계에 고정돼 버린 남성성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대 남성들이 가부장제 때문에 게다가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에게 거의 남아 있지도 않은) 남성성을 비판하기 때문에 진정한 남성성과 더 멀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진 의문점이 있다면, 왜 왕, 전사, 마법사, 연인의 원형을 왜 남성 심리에 국한된 것으로 여기는가이다.
이 책은 명시적으로 남성 심리라고 대놓고 쓰여졌지만 내 자신의 내면 경험과 어긋나서 달그닥거리는 이질감이 없었다. 여자로서 내 삶에서 마주친 문제들과 돌파되는 힘의 원형을 제대로 정리해 주는 느낌을 가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삶의 질서와 체계를 세우는 에너지와 목표 지향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에너지와 심오한 비밀과 의미를 추구하는 에너지와 생의 기쁨을 추구하는 에너지가 왜 남자에게만 있겠는가.
그런데 이를 인류 보편적 원형이 아닌 남성적 원형이라고 말하니 이상한 것이다.
내가 여성적 원형과 함께 아니무스가 거의 대등하게 성장한 특이한 인간형인 것일까? 아니면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심리에 전통적으로 남성몫으로 여겨지던 원형이 활성화되었는데 저자가 간과한 것일까?
젊은시절 여성학의 일환으로 이 책보다 먼저 번역되어 읽은 융 계열의 책이 있었다. 진 시노다 볼린이 쓴 <내 안에 있는 여신들>인데 그때는 심리 분석에 실망감을 느낀 기억이 난다. 그리스 여신들을 보편적인 여성심리의 원형이라고 내세웠는데 내 느낌으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고 편향된 고대 그리스 문명의 냄새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 여신 원형들은 내 안의 다른 인간적 요소와 동양 문명적 유산과 충돌하여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런 책보다는 톨스토이 책 한 권이 인간 보편을 이해하는 데 더 가치 있다고 느꼈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성에너지에 편벽된 신념 체계로 여겨져서 패쓰한 데다 융 심리학도 비과학적인 구라에 불과하다고 섣불리 결론내고 신경을 껐던 어린 허세장이였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융 심리학을 깊이 공부하고 싶은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융이 진지한 초대장을 내게 보낸 것이다.
아서왕 이야기가 유럽인의 집단 무의식속에 원형을 형성했다기보다는 선사시대로부터 내려온 인류의 생체험이 깊이 스며 들어 있다가 중세 서유럽에서 아서왕 이야기로 표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인터넷서점을 뒤져 봤더니 최근 들어 융의 책들이 많이 번역된 것을 알게 되었다. 책 사이로 새롭고 매혹적인 길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