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치하포 사건 : 일본측 조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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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명행

 

-“쓰치다가 일본인이라 민족적 분노와 동기로 죽였다”는 김구측 주장, 믿기 어렵다

-처음부터 돈을 노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우발적인 살해 및 약탈은 아닌 것 같다

-“하인인 조선인도 살해하라. 그를 도주시켜서는 뒷날 증거가 된다”는 증언도 있어 

 

 

우리 측과 오간 다수의 공문서와 조사보고서가 있지만, 아래의 보고서 2건은 자초지종의 요약이 잘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돈을 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김구 패거리들이 십이포에서 치하포까지 줄곧 따라왔다는 것이고, 우발적으로 소지품을 빼앗은 게 아니라, 쓰치다가 타고 온 배를 뒤져서 가져 갔다는 점, 쓰치다가 고용한 종복과 여관 주인 이화보도 살려 두면 후환이 된다며 죽이려 했다는 점에 미루어 판단컨대, 쓰치다가 일본인이라 민족적 분노와 동기에 의해 죽였다는 주장은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1. 인천항 정황 속보 제5호

3월 9일에 황주 치하포에서 나가사키현(長崎縣)의 평민 쓰치다 조료(土田讓亮)가 한인에게 살해당한 전말은, 당시 평양에 출장 중이던 경성 영사관의 경부 히라하라(平原篤武)가 상세히 조사하여 당관(當館) 소속 경부 니이로(新納英彦)에게 그 건을 인도했습니다. 여기 그 전말을 간략히 전달합니다.

 

3월 12일 오후 7시에 쓰치다 조료의 피해 전말은 쓰치다가 (통역으로) 고용했던 조선인이 현장에서 도망쳐 구두로 평양의 히라하라 경부에게 신고하였기에, 사실 취조차 순사 다나카(田中仲三助), 稅所珪介 및 조선 순검 5명을 인솔하여 다음날 13일에 배를 타고 평양을 출발하였습니다.

 

15일에 치하포에 도착하여 지역 촌민 및 쓰치다가 숙박했던 여관의 주인을 심문하였습니다. 쓰치다는 이달 8일 황주의 십이포에서 한인 1명과 함께 한국돈 6표(俵)와 기타 화물을 작은 배에 싣고 진남포를 향하여 가던 도중에 그날밤 치하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9일 오전 3시에 상륙하여 그곳 여관 이화보(李化甫)의 집에 이르러 조반을 들고 승선하려고 앞마당에 나섰을 때, 동숙했던 한인 4,5명이 돌연히 철봉으로 그의 등을 쳐서 결국 그를 때려 죽여, 시체는 강에 던지고 곧 바로 ‘배에 가서 소지하고 있었던 한국 돈과 기타의 것들을 약탈’하여 한국 돈은 숙소 주인에게 맡기고 휴대품을 가지고 해주 방면으로 도주했다고 합니다.

 

당시 혈흔이 땅에 아직 남아 있어, 혐의자인 숙소 주인의 처(당시 숙소 주인은 도주하여 집에 없었음), 촌민과 기타를 잡아 발견한 한전과 기타 물품을 지니고 16일 평양에 돌아와 여러 가지로 힐문한 끝에, 이상 모두가 숙소 주인이 한 바가 분명하므로, 각 지방관에게 가해자의 체포를 의뢰하게 된 것입니다.

 

앞의 쓰치다 조료는 나가사키현 쓰시마국 관할 이즈하라 사람으로서, 당항의 무역상 오쿠보 기이치(大久保機一)가 고용하였으나, 장사를 위해 작년 10월부터 진남포에 도착하여 11월 4일에 황주로 옮겨, 3월 7일 그곳을 출발하여 인천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결국 이와 같은 변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유류 재산은 앞의 고용주에게 인도하였으며, 기타 그의 사망에 관한 친족에의 통첩 등은 앞의 고용주에게 지시하여 두었습니다.

 

 

2. 히라하라(平原篤武) 경부 평양 출장 시말 보고의 건(1896년 4월 2일)

 

별지 공신 제78호
별지 보고서 [스치다 조로(土田讓亮) 살해의 건 보고]
경부 히라하라(平原篤武)

 

(중략)

 

12일 오후 7시경 일본의 나가사키현 사람 쓰치다 조료가 하인인 평안도 용강(龍岡) 출신 임학길(林學吉)과 함께 한국 돈 꿰미 6표(俵)와 버들고리(버드나무로 만든 고리짝, 편자) 한 개를 황해도 십이포에서 배에 싣고 진남포로 운반하는 도중에 치하포에 도착하여 밤이 되어 그곳에 배를 매고 배 안에서 1박하였습니다.

 

다음날 9일 오전 3시에 그곳 숙소인 이화보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바로 출발하려 할 때 십이포에서 온 여객 7,8명이 일본인을 살해하라고 말하고 뒤에서 쓰치다를 세게 때리기에 여관 주인에게 구조를 청했지만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인인 조선인도 살해하라. 그를 도주시켜서는 뒷날의 증거가 된다”고 말하며 2,3명의 흉한이 추격했지만, 그는 현장을 도주하여 겨우 12일 오후 7시경 평양에 와서 쓰치다는 필시 살해 당했을 것이라고 소(訴)를 제출하였습니다.

 

(중략)

 

다음 13일 배(和船)을 빌려 치하포를 향하여 순사 다나카(田中仲之助), 稅所珪介가 조선인 순검 5명을 데리고 15일 새벽에 치하포에 도착하여 십이포에서 온 화선주 대표 2명과 그곳에 거주하는 한이치(韓已治)와 이화보의 처(이화보는 순사가 온다는 말에 도망하여 집에 없음)외 2명과 안악 군수로부터 이화보를 체포하러 파견된 1명을 붙잡아 심문함에 “십이포로부터 7,8명의 사람이 쓰치다 조료를 추적하여 와서 여관에 숙박하였고, 그 여행객이 쓰치다를 살해하여 사체는 물 속에 던지고 한국 돈과 쓰치다가 휴대하였던 일본도를 가지고 갔으며 가해자의 의복에 혈흔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순검으로 하여금 이화보의 집을 수색함에 쓰치다의 버들고리 1개와 한전 78관 870문이 있어 이화보의 처에게 조사한 바 “그 도적들이 쓰치다의 배에서 인양하여 여관 주인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동 16일 혐의자 일동을 평양에 인계하고 귀환하였습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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