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대, 한국인들은 묻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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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희

 

<오징어게임> 작가는 우리 사회의 경쟁에서 오는 비극성을 ‘보편적’이라 생각

미국 문화는 개인 간의 부나 권력 혹은 실력 차이를 불평등으로 인지하지 않아

착하게 살면 부자 되는 <흥부전>에 박수치던 도덕사회로 돌아가면 행복할까?

 

 

4.
<오징어게임>의 작가는 우리 사회의 경쟁에서 오는 비극성은 보편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국 <가디언>지와 인터뷰에서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은 자본주의 사회 어디서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개인이 느끼는 절망은 한국처럼 공적인 영역에서 공동체적 문화가 우세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좀 더 심각하게 나타날 것 같다.

 

미국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 사회는 각 분야에서 훨씬 경쟁이 심하고 소득 격차 또한 크다. 그러나 공과 사 구분이 명확하고 직장에서 인간관계는 비인격적인(impersonal) 계약 관계로 생각하기 때문에 직원들은 계약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하고 그 일에 책임을 질 뿐 다른 구성원들과 정서적 유대감은 약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친절하지만 그 친절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한국인의 ‘정’과 다르다. 사랑이나 우정처럼 인간관계의 따스함이 존재하는 공동체적인 관계는 사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감성적 사랑이 존재하는 사적인 영역과 이해타산과 경쟁이 지배하는 공적인 영역은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가정과 이웃, 교회 혹은 다른 친교의 영역은 정치와 경제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소중한 영역으로 보호받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소소한 사생활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국가 정책은 사적인 영역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중대한 이유가 아니면 침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영역에서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실패하는 것이 지금껏 쌓아올린 공동체적 관계의 상실과 인생의 실패로 쉽게 귀결되지 않는다. 미국의 노동자 계층이나 빈곤층은 중산층보다 더 가족이나 친척과의 유대관계가 강하며 비상시에는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미국인들은 대체로 경쟁을 좋은 일로 받아들이고 소득 차이를 인정한다. 일 잘 하는 사람이 빨리 승진하고 많은 성과급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스포츠 정신은 미국 사회의 평등 정신을 잘 보여 준다. 잘 하는 팀이나 선수가 경쟁에서 이긴 것을 축하해 주고 아무리 속상해도 졌다고 울거나 하지 않는다.

 

경쟁의 결과에 승복하는 것은 기본 에티켓이다. 가정에서 부모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게임이나 놀이를 통해 공정하게 경쟁하고 그 결과에 대해 승복하는 법을 가르친다. 즉 미국 문화에서는 개인 간에 존재하는 부의 차이나 권력의 차이 혹은 실력의 차이가 불평등한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평등하며 대통령과 백악관 청소부가 평등하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착하게 살아서 부자가 되는 <흥부전>에 박수치던 도덕 사회로 돌아가면 행복까?

 

미국 사회에서도 평등은 자유와 함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다. 그러나 무엇이 평등인가 하는 것은 우리와 다르다. 미국 문화에서 평등은 철저하게 법 앞에서 평등을 뜻한다. 나이와 성별, 인종, 국적 등에 따라 차별적으로 법이 적용되는 것에 반대된다. 평등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권리를 말하며 압정과 간섭으로부터 원치 않는 일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루쓰 베네딕트, <국화와 칼>, 130-31, 209-10).

 

조직 사회에서도 상급자와 하급자가 평등하다. 부하 직원이 상사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지시하는 상급자와 지시받는 하급자 간의 관계는 비인격적인 법규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직장 상사의 권위가 법률에 의거한 권위이기 때문에 업무 관계가 아닌 사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지 않는다. 즉,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하다.

 

반면에 한국인은 앞 글에서 살펴봤듯이 어디서든지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분한다. 가정에서는 형과 동생을, 학교와 직장에서는 선배와 후배를 다르게 대한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를 두고 불평등하거나 비민주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빈부 차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미국 문화에서 자본가나 부자에 대한 인식 또한 당연히 부정적이지 않다. <오징어게임>에서 자본가는 쾌락을 위해 살인 게임을 설계하는 악마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역사적으로 서구의 자본주의는 지독하게 자기 규율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부르주아 문화와 함께 탄생하였다. 이는 종교 개혁 이후 서구에 널리 확산된 신교의 교리와 관련된다. 막스 베버가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명료하게 분석했듯이 근대에 태동한 자본주의는 인간 사회 어디에나 있는 배금주의나 탐욕의 추구와 다르다.

 

베버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과 자본을 과학과 이성에 근거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데 있다. 이러한 사회 조직은 자본가와 관리자, 그리고 노동자의 엄격한 자기 규율을 필요로 한다. 신교의 새로운 교리는 부를 축적하는 행위에 신의 찬미와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고 금욕주의적이고 규율적인 생활을 강조하여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구하였다고 베버는 설명했다.

 

우선, 역사적으로 종교 개혁 이후 등장한 신교의 여러 종파들은 공통적으로 산업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세속에서 노동에는 신의 찬미라는 의미가 부여되었으며 게으르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심각한 죄악으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일할 수 있는데 구걸하는 것은 죄악이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돈은 가능하면 많이 벌고, 많이 저축하고, 많이 기부하라”(Gain all you can, save all you can, and give all you can)고 설교했다.

 

또한 신교는 중세 가톨릭교에서 성사와 교회를 통해 구원받는 것을 완전히 거부함으로써 신앙에서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신도들이 충동적인 행동이나 기쁨, 슬픔, 분노 등의 격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자제하도록 했다. 감정 표현을 절제하는 냉철한 이미지의 자본가나 사업가들은 가장 윤리적인 인물로 18,19세기 부르주아 사회에서 존경받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에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분업 체계와 이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의미의 체계가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노동과 직업에 부여된 종교적 의미는 많이 퇴조하였다. 21세기 글로벌 경제 체제 속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 격차를 개인이 어느 정도 의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는 더 이상 종교적 교리에 의해 해결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미국 사회의 빈부 격차가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에게 ‘지옥’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징어게임>은 잔혹한 오락 영화이면서 동시에 한국 사회에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렇게도 부러워하던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왜 한국인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부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핵심인 자본주의 경제와 경쟁을 억누르는 유교적 ‘공동체’ 문화가 어느 정도까지 함께 갈 수 있을까? <오징어게임>의 작가는 인정 많고 의리 있는 공동체적 인물 성기훈으로 하여금 서바이벌 게임에서 승리하게 만들어 한국적 자본주의의 인간성 회복을 시도한 듯하다. 현 정부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기조와 비슷하다.

 

그러나 기훈을 승리자로 만든 공동체 서사는 전래 동화 <흥부전>을 생각나게 한다. 자식만 많이 낳고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마음만 착한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더니 제비가 은혜를 갚아 부자가 되는 이야기는 도덕 사회에서 부의 의미를 여실히 보여준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착하게 살아서 부자가 되는 이야기다. 우리는 <흥부전>에 박수치던 도덕 사회로 돌아가면 행복할 것인가?

 

<리스트>

불안한 현대, 한국인들은 묻는다(1)

불안한 현대, 한국인들은 묻는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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