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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광제
–남긴 글 없는 소크라테스철학 이해한다는 것은 철학사적 연구의 가장 힘겨운 과업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인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 명제의 주창자 아닌,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뒷받침된 인간의 창조자
주로 플라톤, 크세노파네스 및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부터 전해져 오는옛 기록을 토대로 하여 – 그것도 그럴 것이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런 글도 남긴 것이 없으므로 – 소크라테스철학에 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철학사적 연구가 직면한 가장 힘겨운 과업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즉, 아무리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모두가 간접적인 방법, 즉 귀납적 추리에 의해서 파악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철학 방법’에 관한 명료한 인상이 부각될 수 있도록도 주로 이러한 측면에 국한하여 이야기하겠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인간사에 관하여 담소하는 가운데 이를테면 경건한 것, 비종교적인 것, 아름다운 것, 욕된 것, 의로운 것, 또는 의롭지 못한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을 두고 말하는가? 혹은 신중함과 경박함, 용감한 것과 비열한 것이란 무엇을 일컫는 말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나 정치가 또는 정부나 통치가 지켜야만 할 도리는 어떤 것인가 하는 등등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자기가 확신하기로는 이상 얘기된 문제를 올바르게 통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선하고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 모든 것을 연구하는 일에 소크라테스는 전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대화술(對話術)이나 교육방법이란 특수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말하자면 여기서는 제자가 물음을 제기하면 스승이 해답을 내리곤 하는 통상적인 방법과는 다른 반어법(反語法)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스승이면서도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는 쪽이 되어 있는 소크라테스는 흔히 자기 어머니의 직업이기도 했던 산파역을 담당하는 것을 자기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자기 자신이 지혜를 낳을 수는 없으되 그러나 타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사상을 이끌어내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특유의 방법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학파의 변증법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기도 했고, 실제로 그는 소피스트의 논리적 재치나 술책을 못마땅히 여기지도 않았다.

델포이 신전의 아폴로 신탁은 자기의 무지함을 쉴새없이 되뇌는 사람을 가장 현명한 아테네 사람으로 지칭했다.
그런데 이밖에도 또한 그가 소피스트와 동일한 방향을 간다고 볼 수 있는 점은 이들이 다같이 자연에 대한 이념을 전혀 배제한 채 오직 자기들의 관심을 인간에게만 쏟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언제나 소크라테스가 어김없이 도달하는 결론, 즉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고 한 유명한 한마디는 흡사 소피스트의 회의적 방법과 동류에 속하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 등이다.
그러나 여하간에 델포이 신전의 아폴로의 신탁은 자기의 무지함을 쉴새없이 되뇌는 바로 이 사람을 가장 현명한 아테네 사람으로 지칭하기도 하였거니와, 실제로 그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전체 철학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가장 심대한 사건의 하나임이 틀림없는 것이었다.
자기를 올바르게 계도함으로써 스스로 불의에 휘말리는 그 어떤 행동으로부터도 자신을 멀리 하게끔 만드는 어떤 내면의 마음의 소리와 같은 것이 자기 내면에 깃들여 있다고 느꼈던 그는 이것을 ‘다이 모니온, dai-monion’, 즉 양심(문자대로의 뜻은 신적神的인 것)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이론 속에는 어떤 끊임없는 갈등이 일고 있었는바, 즉 한편으로는 신神들에 대한 의무를 가장 중요한 인간의 의무로 간주할 정도로 극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그로서는 조용한 가운데서도 결코 잦아들 리가 없는 양심의 소리를 더이상 이론적으로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 보면 그에게 있어서 도덕과 인식은 일치하는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하지 못할 때는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인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행하려 하거니와, 또한 윤리적 선도 바로 다름아닌 자기의 행복과도 일치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에게 도덕적 품성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오직 그들에게 참다운 덕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도덕과 지식의 일치를 논한 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이론이 성취한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발견인 것이다. 자기자신의 무지를 깨우침으로써 스스로를 검증하고 반성하도록 각성시키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너 自身을 알라!’고 한 희랍어로 된 옛 문구 (gnothi seauton, 그대로 너를 알라; 이 말은 신전의 비석이 새겨져 있다)를 통해서 사람들을 감화시키려고 했다.
인간이란 만약 자기가 도덕적 빈곤과 맹종성으로 인하여 스스로 덧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 성찰에 의하여 통찰하기에 이를 수만 있다면 모름지기 그들은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며 동시에 이를 동경하게도 되리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는 결코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는 어떤 일반적인 인간들을 문제로 삼은 일은 없고, 언제나 직접 자기 눈 앞에 모습을 나타낸 실제적인 개개의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어떤 일반적 명제의 주창자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뒷받침된 다름아닌 인간의 창조자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야말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비길데없이 강한 힘, 즉 다시는 안정된 상태 속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게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발산했던 그의 인품이 모든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얼마나 큰 감명을 주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의 입을 빌어서 플라톤이 그의 대화록 ‘향연’에서 실토한 내용을 참고로 하면 족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적어도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어떤 다른 사람이 제아무리 훌륭하다는 웅변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듣고서도 별다른 인상을 받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나 일단 우리가 당신이 손수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거나 혹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제3자를 통하여 전해 들을 경우에도 너나 할것 없이 우리는 모두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여러분, 실로 내가 이 사람의 웅변을 듣고서 그 얼마나 감동하였으며 또한 지금까지도 감동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에게 맹세코 강조해 두려는 것입니다.
(중략)…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꼭같은 경험을 한 것을 나는 알고 있지요. 그런데 나는 이 사람에게서만은 아마도 나 자신이 좀처럼 느껴볼 수도 없었던 그런 기분을 경험하게 되니, 그것은 즉 내가 타인 앞에서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기기조차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나는 이 사람 앞에서만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관하여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自負할 만한 몇가지 측면만을 놓고서도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그가 제아무리 위대한 도덕적 품격을 타고나서, 결국 자신의 확신에 따라서 죽어간 훌륭한 인물이었다고는 하지만 본래의 자기 철학이 지니는 핵심부분은 좀처럼 포착될 수는 없었던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어떻게 그와같이 거대한 역사적 족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 우선 여기서 지적해 둘 것은 그리스도교 초창기의 여러 가지 문헌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되기도 하거니와, 하여간에 그리스도 자신이나 또는 기원전 시대의 순교자들의 운명과도 비길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지니는 의의가 바로 그를 향한 특히 강렬한 추념을 자아내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이 물음에 대한 참다운 해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야만 하겠다:
즉, 후세에 끼친 소크라테스의 크나큰 영향은 인류 역사 속에 아로새겨진 가운데 더욱더 찬연한 빛을 발하는 문화적 활력으로 승화된 그의 사상이나 교훈에서 기인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으로 수천년이 흘러도 끊임없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할 그의 독보적인 인품에서 연유하였다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자기자신 속에 확고하게 뿌리박힌, 자율적인 도덕적 인격을 바탕으로 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나갈 문화적 활력이라고도 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름아닌 선 그 자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내면적 자유를 간직한 인갸에게 바쳐진 ‘소크라테스의 복음’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플라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연재 리스트>
1. 철학의 탄생 | 2. 밀레토스 학파와 피타고라스 |
3. 엘레아 학파 | 4. 헤라클레이토스 |
5. 웅변학원 1타강사, 소피스트들 | 6.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소피스트 철학 |
7. 소크라테스의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