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대, 한국인들은 묻는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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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희

 

-경제적 불평등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받아들이는 정도도 문화에 따라 달라

-한국사회에서 사회 ‘지도층’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라는 의식이 잔존

-작가는 말한다. “<오징어게임>은 바로 현실이라고. 지옥 같은 현실”이라고

 

 

3.

그렇다면 <오징어게임>의 상상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미국의 많은 대중 매체들은 <오징어게임> 열풍에 대해 한국이 급속도로 경제 성장을 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사회 문제가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빈부 격차는 세계 각국과 비교할 때 월등히 크다고 하기는 어렵다.

 

2018년 OECD 국가들의 지니 계수(처분 소득 기준)를 비교하면 한국은 8위이다. 한국보다 지니 계수가 높은(불평등한) 주요 국가들은 미국, 멕시코, 영국, 터키, 이스라엘, 브라질 등이다. 그리고 한국보다 지니 계수가 약간 낮거나 거의 비슷한 국가는 일본, 스페인 , 이탈리아 등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오징어게임>이 세계적으로 메가 히트를 친 것에 대해 미국이나 영국의 대중 매체들은 <오징어게임>을 보고 빈부 격차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고 많이 공감할 수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한국보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미국이나 영국의 대중문화에서는 그동안 부의 양극화 문제가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외국 대중 매체의 이러한 반응은 한국 사회가 빈부 격차를 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를 인식하는 데는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미국의 대중 영화에서 악당이 여성이나 어린이를 납치하여 생명을 위협하면 건장한 주인공 남자가 달려오든지 날아와서 여성과 어린이를 구하는 것은 헐리우드 영화의 인기 소재이다. 즉 신체적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상황을 주인공 남자가 우월한 신체적 능력이나 물리적 힘을 써서 해결하는 영웅 서사는 미국 사회가 자유라는 가치를 떠받들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물리적 힘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반면에 한국 영화에서 어린이와 여성의 유괴나 납치 혹은 비슷한 상황을 설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불평등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받아들이는 정도도 문화에 따라 다르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유교적인 문화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조선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 특히 성리학에서는 이익의 추구를 자제하고 의리를 추구하는 것을 도덕의 기초로 삼았으며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보다 골고루 분배하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게임장에서 정붙인 사람들끼리 경쟁하게 만드는 스토리는, 한 편으로 회사가 가족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경쟁시켜 누군가를 쫓아내는 잔인한 현실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오징어게임>은 바로 현실이라고. 지옥같은 현실이라고.

 

여기서 ‘의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뜻하며 ‘이익’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물질은 한정되어 있으며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경쟁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된다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생각했다. 특히 사림이 득세했던 조선 중후기에는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훨씬 더 상공업 활동을 억압했으며, 그 결과 19세기 말까지 중국과 일본보다 산업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진적이었다.

 

부자들의 사회적 지위 또한 결코 높지 않았다. 조선 후기 지배 계층이었던 양반은 자신의 이익보다 의리를 추구하는 ‘군자’라고 공동체에서 인정받은 사람과 그 후손들을 일컬었으며,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 사실만으로 지배 계층인 양반으로 공인받지 못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양반제는 사라졌지만, 사회의 ‘지도층’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아직도 강건하게 존재한다.

 

지난 반 세기 이상 지속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은 가난한 후진국이었던 한국을 소위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했지만, 함께 진행된 경제적 불평등은 균분과 안정을 강조했던 문화적 전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부의 양극화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 불안 요소로 종종 정치 이슈가 되었다.

 

바로 내년 대통령 선거의 여당 후보가 내세운 슬로건도 “모두 함께 잘사는 대동세상”이다. ‘대동세상’은 유교적 평등주의를 집약한 개념이다. 이재명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며 선언했다. “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 정치로 모두 함께 잘 사는 대동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라고.

 

빈부 격차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오징어게임>의 스토리에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대동사회’를 이상화하는 유교적 경제관이 깊이 스며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유교의 평등주의 관점에서 볼 때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가득 차 있는 너무도 부도덕한 세상이다.

 

작가 겸 감독으로 이 드라마를 만든 황동혁은 영국 <가디언>지와 인터뷰에서 <오징어게임>은 바로 현대 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도 불공평한 세상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있지 않나요?” <오징어게임>에서도 프론트맨이 일갈한다. ‘바깥 세상’에서 사람들은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 왔다고. 오일남의 입을 빌려 작가는 “바깥 세상은 <오징어게임>보다 더 지옥”이라고 단언한다.

 

지옥 같은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는 심지어 인민 대부분이 굶주림 속에 사는 북한의 공산주의 사회와 비교해도 별로 나을 것이 없다고 작가는 6화에서 강새벽과 지영의 대화를 통해 암시한다. 강새벽은 남한이 더 나은가 하는 지영의 물음에 대답을 회피한다.

 

유교적 관점에서 <오징어게임>의 자본가들은 끝없이 이기적인 욕망을 탐하는 부도덕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호스트와 6명의 VIP들로 나오는 자본가 혹은 부자들은 재미를 위해 살인 게임을 설계한다. VIP들이 모두 영어로 얘기하며 1명은 중국계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이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전 지구적으로 활동하는 자본가들이다. 이 억만장자 부자들은 게임 참여자들을 인간 말로 취급할 뿐이다.

 

나는 <오징어게임>보다 더 심하게 자본가들을 악마적으로 그린 헐리우드 영화나 드라마는 보지 못했다. 미국이 서바이벌 영화 <헝거게임>에 비슷하게 게임을 구상한 최고 권력자가 등장하지만 그는 정치인이지 자본가는 아니다.

 

작가는 부자들이 악마적으로 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오일남은 죽기 직전에 기훈에게 물었다. “그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은 후에도 사람을 믿냐”고. 돈에 대한 욕심으로 추잡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다 보고나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는지 묻는 것이다.

 

덕치를 강조하는 유교에서 법령과 형벌에 의한 통치를 바람직하지 않게 보았듯이, 작가는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법치’에 대해서도 냉소적이다. 게임의 룰을 집행하는 진행 요원들은 공정과 평등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부자들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간 병기로서 역할을 할 뿐이다. 드라마 4화에서 불이 꺼지면 참가자들이 서로 공격하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일 때, 룰 집행자들은 오히려 약육강식을 부추겨 약자들은 솎아지고 강자만 살아남도록 만든다.

 

또한 일부 진행 요원들은 마치 부패한 공무원처럼 게임 참가자 중 한 사람인 의사와 손을 잡고 장기 밀매를 하고 그 의사에게 다음 게임에 대해 미리 알려 주었다. 즉 작가는 룰을 집행하는 집행자들이 공정과 평등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자본가의 하수인 역할을 하며 약자보다 강자의 편을 들고 나아가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부패한 집단이라는 걸 보여 준다.

 

부도덕한 자본주의 계급 사회에서 작가는 성기훈과 같은 인물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훈은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작가가 헐리우드 영화의 영웅 서사를 거부하고 기훈의 따뜻한 인정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은 유교의 덕치주의가 마음의 수양을 중요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성기훈은 유교에서 강조하는, 이기심을 자제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공동체적 인간형에 가깝다.

 

기훈의 정의로움은 남자의 ‘바깥일’과 여자의 ‘내조’로 이루어지는 유교적 성역할을 고수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기훈은 사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동료들과의 의리를 더 중요시했다. 기훈과 그의 이혼한 아내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기훈은 아내가 딸을 출산하던 날 회사의 동료가 파업 시위 중에 경찰의 진압 때문에 자기 눈 앞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와 아기는 하마트면 출산 중에 죽을 뻔하였다.

 

드라마 엔딩에서 기훈은 미국에 있는 딸을 만나러 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어디론가 간다. 직전에 프론트맨에게 전화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딸과의 만남을 잠시 미루고 인간 학살을 벌이는 <오징어게임>이 다시 진행되는 것을 막으러 가는 것은 아닐까 유추할 뿐이다. 어쨌든 기훈은 아빠로서 1년 이상 만나지 못한 어린 딸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사회의 악당들을 쳐부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신성시하는 서구 문화권의 시청자들은 이해하기 힘든 결말이다. 작가의 <가디언>지와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의 유명한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Lebron James)는 <오징어게임>을 좋아하지만 결말이 맘에 안 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나의 미국인 지인들도 똑같이 얘기했다.

 

성기훈이 사적 영역에서의 가족 관계보다 가정 밖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 생활과 동료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일이 가족보다 중요하다”는 산업화 세대의 조직 문화와 가정에 충실한 남자를 소시민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하던 586 운동권의 공동체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공동체적 조직 문화에서 자기 일이 끝났다고 집에 가는 것은 이기적이라고 여겨진다. 조직에 속한 이상 개인 생활은 어느 정도 희생되어야 조직이 잘 된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는 가족을 대표하는 ‘가장’으로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여성의 ‘내조’가 필요하다. 즉 가정까지 조직에 포함된다고 본다. 특히 많은 대기업들은 그야말로 ‘가사불이’(家社不二) 슬로건을 내걸고 회사에 대한 직장인들의 충성이 바로 가족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이런 공동체 문화는 경쟁보다 네 일, 내 일 따지지 않고 서로 힘을 합쳐 다같이 힘을 합쳐 일을 끝내는 것을 중시한다. 조직의 구성원들은 상호 의존적이어서 노동을 기능적으로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직장에서의 관계가 계약 관계 혹은 업무상의 관계라고만 인식되지 않는다. 조직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 못지 않게 ‘정’이 있는 인간 관계, 화목한 관계, ‘가족’같은 관계가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고 구성원들 개인의 발전을 가져 온다고 믿는다.

 

상급자가 규정에 따라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것만으로 부하 직원에게 일을 효과적으로 시킬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즉 부하 직원이 자발적으로 상급자를 따르고 좋아할 때 상급자가 지시한 일이 잘 수행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상적인 상사는 업무에서 일을 잘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비업무적인 면에서도 하급자에게 모범이 되고 조언을 줄 수 있는 ‘형’으로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이는 현대 기업 조직의 분업 체계를 ‘윗사람’의 도덕적 권위를 강조하는 유교적 위계 관념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한 식구’라는 공동체 의식은 퇴근 후 회식이나 모임을 통하여 고양되고 직원들의 소속감과 동료 의식을 강화시킨다.

 

공동체적인 조직 문화에서는 직원들을 객관적인 평가 시스템을 통해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빨리 승진하고 일을 못 하는 사람은 승진에서 탈락시키거나 해고하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며 인화를 해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조직 문화에서는 당연히 평생 고용이나 연공 서열 같은 고용 관행이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평생 고용이나 연공 서열은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때만 유지가 가능하다. IMF 경제 위기 이후 경영상 피치 못할 이유로 혹은 저성과자라는 이유로 정리 해고하는 것이 법제화되면서 회사 내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고 할 수 있다.

 

<오징어게임> 6화는 공동체적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경쟁의 비극성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회사에서 업무 실적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할 때, 경쟁의 대상은 사실 ‘남’이 아니다. 미우나 고우나 같은 부서의 동료 직원들은 식구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이다. 자기 일이 아니어도 서로 도와주고 일이 끝난 후에는 함께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낮에 혼냈던 부하 직원의 맘을 풀어주고 술기운을 빌려 상사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할 수 있었다. 일과 친교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 잠만 집에서 잘 뿐, 모든 시간을 직장에서 보냈다.

 

그런데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후배가 일을 잘 해서 혹은 사내 정치를 잘 해서 또는 빽이 든든해서 먼저 승진하고 자신은 연거푸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명퇴당할 때 그 사람은 그야말로 죽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만인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존감은 부서진다.

 

‘번듯한’ 직장과 직위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직장을 잃는 것은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진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바깥일’을 하도록 키워진 남자에게 실업은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규정했던 바깥 사회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상실을 의미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오징어게임>은 그 절망감을 좀더 과장했을 뿐이다. 6화는 기훈과 깐부 할아버지, 상우와 알리, 새벽과 지영 등 게임장에서 정붙이게 된 사람들끼리 그리고 부부까지 경쟁하게 만들어 눈물을 자아냈다. 한 편으로는 회사가 가족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경쟁을 시켜 누군가를 쫓아내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오징어게임>은 바로 현실이라고. 지옥같은 현실이라고.

 

<리스트>

불안한 현대, 한국인들은 묻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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