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여행 7. 소크라테스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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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광제

 

-억센 인상 풍기는 짤막한 체구와 넓은 머리통, 납작한 코. 흡사 막노동꾼과도 같은 모습

-격의없는 문제부터 시작, 점차 깊은 뜻이 담긴 문제로 파고들어. 진지한 사유태도 보여

-덕(德)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가? 최선의 국가는 어떤 것인가 등

 

 

•독배를 마시는 순간

아테네 출신의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였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기원전 470년에 태어났다. 그는 남다른 대담성을 지녔면서도, 자기의 출생지인 아테네를 떠난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그의 흉상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일반적인 희랍인의 모습이나, 특히 철학자의 모습과는 흡사한 데가 전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억센 인상을 풍기는 짤막한 체구와 넓은 머리통 그리고 납작한 코를 가진 둥근 얼굴에서 나타나는 그의 전체적인 용모는 흡사 막노동꾼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그는 자기 부친이 종사하던 직업이나 심지어는 가족마저도 등한히 한 채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이로 인하여 소크라테스를 비난한 일은 하나의 전설이다시피 하지만) 그보다 앞서 어느 누구도 일찌기 그와 같은 심혈을 기울인 바가 없던, 바로 그 스스로의 천직이 되다시피 한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처량할 정도로 누추한 옷차림을 한 채 아테네의 거리를 거닐던 그에게는 언제나 제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들 제자 중에는 아테네의 상류계급 출신도 많이 끼여 있었지만, 그는 무보수로 수업하었으므로 그의 식생활만은 제자들이나 혹은 친지들에게 신세를 지는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교육방법은 전적으로 질의응답을 통한 대화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또 소크라테스는 단지 자기 제자들에게만 그런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 아니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나 어떤 계층에 속하는 사람에게라도 선뜻 질문을 하곤 했다.

 

처음에는 언제나 격의없는 문제로 부터 시작하여 점차 깊은 뜻이 담긴 문제로 파고들어가면서 그는 진지한 사유태도를 취했다. 그는 마침내 대화의 내용을 점차로 덕(德)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가? 또는 최선(最善)의 국가는 어떤 것인가? 라는 등등의 보편적인 철학문제로 이끌어 갔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산파술이라고 부른다.

 

격의없는 문제부터 시작하여 점차 보편적인 철학문제로 이끌어가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산파술이라고 부른다.

 

이때 그는 대화 상대자를 철저하게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상대자가 자신의 무지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하게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목적 하였던 성과였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같은 인생을 거쳐온 소크라데스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당시 아테네의 정치적 정세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 당시 아테네 헌법이 극히 민주적 성격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와같이 그리스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데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점, 즉 그리스 전체 인구 중 그 대다수, 예를 들어 아테네 주민만 하더라도 그 반수 이상이 어떤 권리도 향유하지 못한 노예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들의 노동의 댓가가 그 나머지 주민들의 여유있는 생활을 위해서 탕진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즉 민주헌법이란 소수 자유시민에게만 한정된 것이어서, 감히 어느 누구도 노예제도의 타당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단 이상과 같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제약성을 제쳐놓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그 원칙 자체가 지나치게 적용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철저하게 시행된 점이 없지 않다. 특히 민주주의의 반대자였던 귀족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와 같은 국가형태란 원칙 자체가 빗나간 과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거의 30년간이나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 -404년)을 당해 아테네로서는 마땅히 자기들의 적인 스파르타를 무찌르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서는 통치권력을 수중에 넣고 있던 민주주의자와 그리고 은연중에 스파르타의 귀족주의적 헌법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자들 사이의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로서는 현실정치에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귀족주의적 정파의 옹호자, 이를데면 바로 이 정파에 대한 이념적 무기의 제공자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아테네가 굴복하게 되자 이들이 이끌어 가던 민주주의도 일시적인 패퇴를 모면할 수 없었으나, 결국은 그 뒤를 이은 또 한 차례의 정부 전복으로 인하여 민주주의 신봉자들이 최종적인 권좌에 올라서게 됨으로써 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운명도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고야 말았다.

 

즉,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의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게 되었으나 사실 그에게는 이러한 죄명이 전혀 부당한 것이었다. 법정에서 한 그의 대담한 자기변호에 대해서는 플라톤이 전해주는 글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결국 그는 사형판결을 받은 그는 당시의 통상적인 처형방법에 따라서 독약을 마셔야만 했다. 그는 사면을 신청할 것도 거부하였고 더우기 피신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포기한 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로서는 아테네에서 도망하여 망명길에 오른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즉 그는 자기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플라톤의 대화록 「파이돈, Phaidon」 속에 그 비장한 장면이 세밀하게 서술되어 있다.

 

“계속 그곳에 머무르면서 우리는 서로가 지금까지 얘기한 것에 관해서 논의도 하고 또한 그에 관해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결국 자신들에게 닥친 이와 같은 불행을 다시 슬퍼 하면서 결국 우리는 마치 아버지를 잃은 고아와도 같이 이제는 다른 세계에 가서 삶을 이어가야만 하리라는 데에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는 목욕을 하고서 어린 두 아들을 불러들였으며, 또한 자기와 친족관계에 있는 여자들도 자리를 같이 하게 되자 크리톤도 임석한 가운데 그는 그들 모두와 얘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부탁을 하고서 그 여인들과 아이들을 모두 다 돌려보내고 난 다음에 그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와같이 그가 감방 속에 오래 있다보니까 어느덧 석양이 지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 되돌아와서 그가 목욕을 하고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우리는 별로 많은 얘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있던 참에, 마침 1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하인이 그에게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소크라테스여, 내가 관청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서 사형수마다에게 독배를 들도록 명하면 그들은 모두 나를 원망하고 저주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결코 나는 이들을 탓하지 않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나는 그대에게도 전혀 탓할 생각이 없다네.

 

여하간에 요즘에 와서 나는 그대야말로 일찌기 이와 꼭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 중의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온화한 인품을 지닌 극히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분명히 그대는 나를 탓하기 전에 (왜냐하면 그대는 이 모든 일이 누구에 의하여 저질러졌는가를 알고 있을 것이므로) 오히려 그를 배심원들을 원망하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네.

 

이만하면 내가 그대에게 부슨 말을 하려고 여기에 왔는가도 알아차었을 것이네. 하여간에 이제는 더이상 어쩔 수없는 일이 돼 버렸으니 오직 담담한 심정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부디 평안히 가기 바라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울음을 터뜨린 그는 고개를 돌리면서 그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크라테스는 ‘제발 잘 가게나, 이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정된 대로 잘돼나갈 것으로 믿네’ 하고 말하였다.

 

그러고나서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참 훌륭한 사람이군. 내가 여기 들어와 있는 동안에 그는 언제나 지금 같이 나를 대해 주었고 얘기도 나누곤 하였으니, 참으로 보기 드물게 착한 사람이라네. 게다가 그는 진심으로 나를 슬퍼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하간에, 크리톤이여, 우리 모두 그의 말을 따르도록 하세. 자 어서 술을 짜놓았으면 가져오도록 하고, 아직 그것이 마련되지 않았으면 속히 준비하라고 그에게 일러주게.’

 

그러자 크리톤이 말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여, 아직도 산등성이에는 했볕이 내려 쪼이는 것을 보면 어두워지지도 않지 않았는가. 내가 알기로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사형선고를 받고는 오래 뒤에야 독주를 마셨다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좋은 음식을 소원대로 먹고 마시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욕정을 채우기 위하여 여자까지 불러오게 하는 경우도 있지 않던가, 그러니 조금도 서둘 필요는 없네, 시간은 넉넉하니까.’

 

이번에는 또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크리톤이여, 자네가 지금 언급한 그와같은 사람들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엇인가 소득을 얻어보려고 그런 짓을 했겠지만, 나는 결코 그런 행동을 할 생각은 없다네. 왜냐하면 내가 시간을 좀더 늦추어서 독주를 마신다고 하여 그 어떤 쓸모있는 소득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오히려 생에만 연연한 나머지, 더이상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래도 내가 무엇인가에 집착하려고 한다 치더라도 단지 내 꼴만 우스워질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자, 어서 가세. 나를 따라만 오면 되니까, 더이상 다른 생각은 말게’ 하고 말하였다.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사람이 죽을 때는 모두들 조용히 해야만 한다는데. 그러니 자네들도 정숙을 지키며 마음을 든든히 먹어야만 하네.’

 

이 말을 듣자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우리는 어쩔수없이 눈물을 삼켰다. 이와 같이 태연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던 그도 마침내 다리에 중압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자기에게 해진 대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에게 독주를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은 이때로부터 수시로 그를 만져 보면서 그의 발과 다리를 검사하거나 다시 발을 세차게 눌러 보기도 하면서 그에게 어떤 느낌이 오느냐고 물었으나 소크라테스는 아무렇지도 않다고만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다시 소크라테스의 무릎과 그 다음에는 점차 신체의 상위부분으로 손을 옮겨가면서, 그의 몸이 점차 식어가면서 또한 경화돼 가는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그의 몸에 손을 대보고 하는 말이 심장부까지 차거워지면 숨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의 하체가 거의 완전히 차거워졌을 때 소크라테스는 그때까지 자기 몸위에 덮여 있던 덮개를 제치고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남겨 놓았다.

 

‘크리톤이여,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잊어버리지 말고 그에게 진 빚을 갚도록 하게나.’

 

잘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다시 크리톤은, 그러나 무엇인가 또 다른 얘기를 할 것이 있는가를 잘 생각해 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크리톤이 이렇게 물었을 때는 소크라테스는 이미 더이상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버렸고 그뒤에 곧 죽음의 신음만이 들려 왔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다시 덮개가 씌워졌으며 그의 두 눈은 이미 생기를 잃고 있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입과 눈을 감겨주었다.

 

우리가 판단하건대 모든 그의 동시대인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이지적이며 또한 의로왔던 인물이며 동시에 우리의 친우이기도 했던 소크라테스의 생은 이와같이 하여 막을 내렸던 것이다.”

 

<연재 리스트>

1. 철학의 탄생 2. 밀레토스 학파와 피타고라스
3. 엘레아 학파 4. 헤라클레이토스
5. 웅변학원 1타강사, 소피스트들 6.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소피스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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