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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경모
-가족을 이루는 한 가지 심리적인 이유는 부모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
-부모는 아이를 통해서 치유받는다. 아이 통하지 않고는 과거와 소통할 방법 없어
-결혼은 서로 탈출할 수 없게 만드는 공간. 자유를 위한 구속, 안식을 위한 전쟁터
왜 여러분의 삶이 갈수록 끔찍해지는지(정신과나 심리학 공부를 하신 분들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살면서 가족을 이루는 심리적인 이유가 있다. 하나는 부모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다. 여러분의 운명은 거의 절대적으로 부모를 벗어나지 못한다. 삶의 대부분은 유전에 의해 운명에 의해 결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업이나 재산 이런 걸 말하는게 아니다. 인생의 진짜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을 구성하고 있는 게 뭔지 생각해 보시라. 그러면 부모와 다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못나고 미운 부모라도 원망하고 저주해선 안 된다. 부모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봐야 한다. 이것은 그냥 진실이다.
둘째, 자식을 보면서 과거를 본다. 여러분의 현재 행동은 무의식에 대부분 지배되고 있는데, 이 무의식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최면에 빠진다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러분의 아이들을 보면서, 또 여러분의 아이를 대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의식 저 너머에 있는 것들을 조금씩 깨닫게 될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자신의 부족한 부분, 평생 넘어서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실마리가 있다. 부모는 아이를 통해서 치유 받는다. 왜냐하면 아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과거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이런 면에서 어떤 낙태는 위험하다. 자신의 과거와 직면을 피하고 회피하고 죽여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셋째, 배우자를 보면서 자신의 결점과 트라우마를 본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모두 알았다. 결혼이 뜻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싸구려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사랑은 행복이 아니며, 결혼이 무한한 구름 속에 파묻혀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깎여 나가는 과정이라는 걸 알았다. 왜냐하면 배우자는 나의 좋은 점 혹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확히 내 단점 내지는 트라우마가 실체화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생의 원수다(이 말은 참 탁월하다).
내가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이유도 사실 그 트라우마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트라우마가 실체화되고 악마화되어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는 공포에 빠진다. 모든 것을 잃을 것 같고 스스로가 죽을 것 같다. 그러면 그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실체화된 트라우마인 배우자와 대화하고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저주한다. 그래서 영원히 이 저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이 저주를 극복해야 우리 무의식이 현실에 이해받고 우리도 해방된다.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도우시길 바랍니다. 세상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해서.
결혼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를 만든 이유도 이와 같다. 심리 상담사가 상담 중 내담자가 탈출한다면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단 두사람만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 속에서 내면을 털어놓는 것이다. 이 시공간 밖으로는 그 무엇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결혼이라는 계약은 이 탈출할 수 없는 시공간의 설정이다. 그래서 그 어떤 못난 사람과 하더라도 이 속에서 어떻게든 해결해낸다면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다. 시간이 지나도 회자되는 동화 속의 개구리와 공주의 키스라든지,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의 왕자의 키스 등도 이런 이야기를 구체화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말로 설명할 순 없었어도 모두 관습적으로 알았다. 결혼이라는 이 공간은 서로 탈출할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공간이다. 진정한 자유를 위한 구속이고, 회복의 공간이며, 안식을 위한 전쟁터다. 지금 눈앞의 배우자가 원수로 보여도 그것은 내 자신의 트라우마이며, 그를 원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 내 마음이 빚어낸 것이다. 그를 사랑할 수 없으면, 그를 용서할 수 없으면,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저주 속에서 평생 갇혀 살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끝끝내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구속과 해방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자유는 그런 게 아니다. 선의 구속이 참 자유고 참 평화다.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진 이유는 그 선을 누가 강요하거나 가르친다고 알 수 없기 때문이지, 자유 그 자체가 해방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을 찾아야만 하고,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만 참 구속과 참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 어떤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뺨을 맞아도, 그 뺨은 상대가 아니라 실은 내가 때린 것이고, 아무리 끔찍한 원수도 실은 내 안의 마음이 빚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모든 세상의 업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이쪽 땅끝부터 저쪽 땅끝까지 모두 내가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수를 사랑하면 지금 당장 이 세상에 영구 평화가 온다. 그 원수란 바로 나 자신이다. 그 원수란 지금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 존재들이 내 평생 주어진 미션이다. 우리는 단지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관계를 통해 과거, 현실, 미래, 시공 저 너머까지 동시다발적인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사랑해라.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해야 한다. 야박하게 굴지 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짧고 순식간에 끝난다. 어쩌면 삶을 바로잡을 순간은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타인을 통해서 스스로를 봐야 한다. 나와 타인이 다르지 않고, 그래야만 정확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볼 수 없는 나의 모습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이 구원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의 화해가 곧 스스로와의 화해고 업의 청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도우시길 바랍니다. 세상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