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대, 한국인들은 묻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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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희

 

-<오징어게임>은 룰에 지배되는 자본주의 계급사회 비정함을 한국문화 시각에서 고발

-게임 즐기는 상류층, 지시대로 따르는 중류층, 동물원 동물같은 하류층으로 인간 구분

-작가는 기훈과 상우를 비교함으로써 미국 대중 영화의 영웅 서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

 

 

한국인들은 묻습니다. “이게 살 만한 세상이냐”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어 아주 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잔인한 장면에서는 눈을 감으며 몰입해서 보았습니다. 그만큼 영화를 만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 인류학자인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영화 속에 나타나는 문화적 상상력입니다.

 

이 영화는 충분히 오락적이면서 동시에 강렬한 사회적, 도덕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처럼 <오징어게임>도 헐리우드에서는 절대 만들지 못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오징어게임>은 룰에 의해 지배된다는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의 비정함을 한국 문화의 시각에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기생충> 줄거리가 무섭고 기이했듯이 <오징어게임> 역시 이국적인 호러 영화로 보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
이 드라마에서 게임이 이루어지는 세팅은 철저하게 계급 사회입니다. 제일 상층은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룰을 만들고 게임을 설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부자들은 너무나 돈이 많아 심심풀이 땅콩으로 서바이벌 게임을 만들어 그것을 보는 것을 즐기는 부도덕한 사람들입니다. 호스트 오일남은 아련하게 먼 옛날 순수했던 유년기에 하던 놀이를 살인 게임으로 바꿔 그 속에서 사람들이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며 쾌락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악한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 게임장을 방문하여 높은 곳에서 관람하는 VIP들 역시 토가 나올 정도로 부도덕합니다. 그들은 오일남의 고객입니다. 바디 페인팅을 한 사람들을 가구로 혹은 장식물로 사용하는 방에서 술을 마시고 게임을 구경합니다. 로마의 검투사들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을 구경하듯 그들도 게임 참여자들이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것을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마치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에 베팅하듯 인간 말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베팅합니다.

 

설계자들은 중간에 게임이 시시하게 진행될 것 같으면 즉석에서 규칙을 바꿉니다. 죽음을 좀더 아슬아슬하게 연출하기 위해. 유리 다리를 건너는 게임에서 한 때 유리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이 빛을 이용해 건너기 시작하자 빛을 비추지 않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운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도록 만듭니다. 단지 죽음을 앞둔 사람의 공포스러워하는 모습을 더욱 즐기기 위해서. 이보다 더 악마스러운 모습이 어디 있을까?

 

VIP들은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진 동물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가면을 쓰고 있을까요? 가면을 쓸 때 사람은 한껏 부도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뻔뻔한 사람을 “얼굴에 철판 깔았다”고 하듯이, 가면을 쓴 사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어떤 나쁜 짓도 할 수 있습니다. 들키지 않으니까. 그들은 황금으로 치장한 동물 가면을 쓰고 동물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쾌락을 위해서 인명을 학살하는 게임을 구경합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존재하는 인간을 가구 혹은 장식물로 사용합니다. 아마 그 화려한 방에서 섹스 파티라도 벌일 것 같은 타락의 기운이 나에겐 느껴졌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웨이터로 서빙하는 잠입 경찰 황준호에게 얼굴을 보여달라고 하며 그를 성적 노리개로 사용하고자 시도합니다.

 

게임 설계자들 밑에는 룰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게임이 ‘공정하게’ 운영되는지, 룰을 어기는 자가 없는지 감시하며 게임에서 진 사람을 그 자리에서 총살하고 그들의 시체를 화장장으로 옮기는 일 등 게임 진행에 필요한 실무적인 일들을 합니다. 그들은 기계처럼 지시받은 대로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합니다. 진행 요원들 중 최고참은 프론트맨이고 일반 요원들은 세모와 네모 그리고 동그라미로 표시되는 세 가지 내부 계급으로 나눠집니다.

 

룰 집행자의 최고 보스인 프론트맨은 ‘공정’과 ‘평등’을 강조합니다. 모두 ‘평등하게’ 똑같은 룰에 따라야 합니다. 예외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부는 부패한 공무원처럼 공정과 평등의 룰에서 일탈합니다. 게임 참여자 중 한 사람인 의사를 몰래 불러내 그에게 게임에 관해 미리 알려 주는 대신 몰래 시체에서 장기를 적출하여 밀매하다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명령받은 대로 룰을 집행하는 진행 요원들은 온 몸을 방호복 같은 핑크색 제복으로 감싸고 있으며 얼굴 역시 검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게임이 진행되는 곳에서 가면을 벗어 얼굴을 보여 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나는 룰 집행자들의 가면이 법과 규칙의 비인격성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그들의 가면은 게임 참여자들과의 인간적인 접촉을 단절시킵니다. 가면을 쓴 진행 요원들은 얼굴 표정이나 눈맞춤 같은 것을 통해 게임 참여자들과 교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아무런 감정 없이 ‘평등하게’ 룰을 집행할 수 있으며, 명령받은 대로 살인하는 인간 병기가 됩니다. 목소리조차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기계음으로 변조되어 나옵니다.

 

룰 집행자 밑에 룰에 따라 게임을 하는 게임 참가자들이 있습니다. 456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상금을 따기 위해 456명이 자기 목숨을 거는 게임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된 루저들입니다. 이판사판의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들은 살인 게임에 참여하게 됩니다. 룰을 바꾸지도 못하며, 그저 주어진 룰에 따라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게임을 해야 합니다.

 

게임 참여자들에겐 가면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남을 죽여서라도 자신은 살아야 하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날 것의 모습 그대로 노출되고 이는 게임 설계자들의 구경거리가 됩니다. 구슬 게임에서 아내가 죽게 하고 자신이 살아남은 어느 한 참가자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 부끄러워 자살하고 맙니다. 만약 그가 가면을 썼더라면 자살했을까요? 게임을 설계한 호스트와 VIP들은 몇백 명을 학살하는 더 큰 죄악을 저질렀어도 자살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악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으니까.

 

이렇게 <오징어게임>에는 하류층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살인 게임을 하는 것을 보며 재미를 느끼는 상류층과, 상류층의 지시대로 하류층을 감시하고 총살하는 중류층, 그리고 동물원의 동물처럼 일방적으로 감시당하고 구경당하는 하류층의 인간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중,하류층은 이 게임장이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세뇌당하지만 각 계층은 격리되어 있고 섞일 수 없습니다. 최상층의 VIP는 아예 하류층이 감히 넘볼 수 없고 덤벼들 수 없는 안전한 곳에서 하류층을 내려다 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악마적인지 하류층은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임을 만들어낸 상류층의 호스트 오일남이 하류층에 잠입하여 함께 게임을 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게 저 높은 곳에서 구경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헐리우드 스타일과 다르게 전개된 <오징어게임>은 미국과 다양한 문화권의 시청자들에게 지극히 신선하고 ‘창의적인’ 잔혹 동화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2.
하류층 루저들 중에 주인공 성기훈이 있습니다. 그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이 절대 아닙니다. 자기 규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나태하고 경마에 빠져 엄마의 생활비까지 다 날려 버리는 실업자입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내 자식이 허리 굽은 엄마에게 얹혀 살고, 이혼한 아내가 키우는 어린 딸 생일 선물도 살 돈을 벌지 못하는 정말 한심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지지리도 못난 아저씨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가장 따뜻합니다.

 

성기훈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을 잘 하고 잘 도와 주는 인정 많고 선량하며 심지어 정의로운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는 게임 끝까지 살아남아 상금 456억 원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1년 후 ‘깐부’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때까지 그는 그 어마어마한 금액에서 만 원 한 장을 꺼내 쓰지 못합니다. 그 돈이 게임을 하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목숨 값, 그리고 엄마를 죽도록 방치한 죄값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는 결승전인 오징어 게임에서 승패가 갈리는 순간까지도 상우에게 상금을 포기하고 함께 살아서 집에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년 후 어느 날, 놀랍게도 기훈은 죽은 줄 알았던 깐부 오일남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아 병석에 누워 임종을 앞두고 있는 그를 재회하게 됩니다. 초대장을 보면 그 시간은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 11시 30분이었습니다.

 

오일남은 기훈에게 자기가 <오징어게임> 전체를 설계했음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게임 하나를 제안합니다. 창밖에 보이는 노숙자가 그대로 얼어죽을 것인가 아니면 30분 안에 (자정이 되기 전에) 누군가 와서 그를 구할 것인가를 두고 두 사람은 내기를 합니다. 인간의 선함을 믿지 못하는 오일남은 크리스마스 자정까지 그 노숙자를 구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에 베팅합니다. 그리고 기훈에게 죄책감 갖지 말고 상금을 받아들이길 권합니다. 그 상금은 기훈의 운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면서.

 

그런데 창밖에는 누군가 노숙자를 보고 경찰에 신고하여 자정 몇 초 전에 그를 구하는 것을 기훈은 보게 됩니다. 오일남이 내기에서 진 것이죠. 그러나 그는 이미 숨을 거두고 난 후였습니다. 그제서야 기훈은 자신이 게임의 승자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깐부 할아버지(오일남)를 희생시켜 게임에서 이겼다는 죄책감을 털어 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추운 겨울밤 얼어 죽어가는 노숙자를 구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은 살 만하다고.

 

성기훈 같은 남자 주인공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오징어게임>이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면 성인 아들이 늙은 엄마에게 그렇게 무기력하고 염치없이 얹혀 살고 경마에 중독된 실업자로 그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엄마는 아들의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 길거리에서 야채 장수를 하고, 손녀딸의 생일을 아들에게 잊지 말라고 챙겨 줘도, 기훈은 집에서 밥도 안하고 설겆이도 안하는 듯합니다. 엄마는 그릇은 물에 담가 놓으라고 말하고 나갑니다.

 

미국의 핵가족 문화에서 자식에 대한 모성은 딱 성인이 될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제 자식도 건사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가난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중 영화가 있던가? 나는 아직 모릅니다. 미국의 대중 문화에서 가난한 남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찾기 힘듭니다. 알콜 중독자, 약물 중독자, 범죄인 등의 문제적 인간으로 나올 뿐입니다.

 

<오징어게임>이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면 기훈은 아마 뛰어난 신체적 능력이나 지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기훈을 게임 참가자 중에서 가장 악당인 장덕수와 어떻게 해서든지 대결하게 하여 결국에는 장덕수가 기훈의 손에 죽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대중 문화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슈퍼맨 영화나 형사 혹은 경찰이 주인공인 영화들은 대체로 그런 서사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초능력을 가진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등의 남자가 (요즘엔 여자도 포함) 세상의 악당을 쳐부수는 이야기에서 미국인들은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많은 영웅 스토리에는 영웅과 미녀의 로맨스도 빠지지 않습니다. 헐리우드판 <오징어게임>이었다면 아마 강새벽과 성기훈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둘이 함께 힘을 합쳐 악당들을 물리치고 상금을 타는 것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황동혁 감독은 헐리우드 스타일의 영웅 서사를 단호히 배격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위에 언급했듯이 성기훈의 따뜻한 인성과 도덕성을 부각시켰습니다. 기훈은 약육강식의 게임 현장에서 약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인정을 베풀거나 양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양보와 배려가 오히려 기훈이 게임에서 유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짝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노인에게 다가가 함께 하자고 하였고 구슬치기 게임에서 노인은 기훈에게 우리는 ‘깐부’라며 승리를 양보하였죠. 유리 다리 게임 바로 전에는 1번이 되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남자에게 1번을 양보하고 제일 마지막 번호를 달게 되어 오히려 유리 다리 게임에서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다른 사람에 대한 기훈의 따뜻한 인정과 배려를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강조하는 상우의 ‘능력주의’와 대조시킵니다. 기훈의 쌍문동 동네 후배인 상우는 가난한 동네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대 경영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엘리트였지만 증권 회사에서 일하다가 고객의 돈을 유용하여 60억의 빚을 지고 이 게임장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상우는 교양 있는 중산층답게 외국인 노동자 알리에게 자그만 친절을 베풉니다. 2화에서 바깥으로 다시 나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알리에게 차비를 주고 컵라면을 사 주고 게임장으로 다시 와서는 한 팀에 끼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중산층의 덕목인 친절은 서민적인 기훈이 베푸는 인정이나 아이들이 딱지와 구슬을 공유하는 ‘깐부’ 관계와 다릅니다. 친절은 상대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복잡한 현대 도시 사회의 좋은 매너일 뿐입니다. 고도로 분업화된 도시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기 때문에 계약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친절은 자기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우는 알리를 속이고 구슬 게임에서 승자로 인정받았을 때도 자신의 등 뒤에서 알리를 쏘는 총소리에 눈 한 번 찡긋할 뿐이었지, 그 이상의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우에게 알리는 같은 운명 공동체인 ‘우리’가 아니라 그저 ‘남’이었던 것이죠.

 

반면에 기훈이 오일남 노인과 맺게 되는 깐부 관계는 끈끈한 공동체적 관계입니다. 오일남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기훈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깐부잖아”. 공유하는 관계,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는 ‘우리’ 관계가 바로 깐부입니다. 기훈은 오일남이 양보하여 자기에게 마지막 구슬을 주었을 때, 깐부라고 좋아했던 그를 속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죄책감에 게임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승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상우는 알리를 속인 후에도 유리 기술자를 밀쳐내 죽게 했고 결승전 전에 고의로 강새벽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엄청 노력해서 경쟁에서 이긴 것이라고 기훈에게 외칩니다. 상우는 자신이 결승전까지 오게 된 것이 다른 사람들 희생 덕분이고 속임수라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이렇듯 기훈과 상우를 비교함으로써 미국 대중 영화의 영웅 서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즉 그는 어떤 사람이 게임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독립된 한 개인으로서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도움과 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헐리우드 스타일과 다르게 전개된 <오징어게임>은 미국과 다양한 문화권의 시청자들에게 지극히 신선하고 ‘창의적인’ 잔혹 동화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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