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추억 ‘사랑에 영수증은 없다’

<<광고>>



¶ 홍기표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동으로 생각나는 20년 전 추억

-외진 시골 마을에서 자주 만나던 내 또래의 유일한 여자였던 그녀, 우체국 아가씨

-답신이 오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내 스스로 많이 발전했다는 위안을 찾을 뿐

 

 

요즘 어느 드라마 OST로 들어간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노래가 인기라고 한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동으로 생각나는 옛날 추억이 있다. 거의 20년 전 추억이다.

 

사랑에 영수증은 없다—–

 

그러니까 내가 춘향전으로 유명한 이곳, 남원에 내려온 것은 작년 봄이었다. 남원의 어느 폐교를 개조해서 민주노동당 중앙 연수원을 만드는 데 일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남원 연수원은 잘 만들어지고 그럭저럭 굴러갔다. 물론 연수원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얘기는 나의 사랑 얘기다.

 

이곳은 남원 시내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구석이라 그런지 20살에서 30살 사이의 젊은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사귄 여자친구들은 다 10살 아니면 9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는 사람도 없고, 외진 시골 마을에서 내가 자주 만나던 내 또래의 여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녀는 우체국 아가씨였다.

 

작년 봄, 흙먼지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처음 우체국에 들었던 이후로 나는 우체국에 볼일이 잦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손님인 내게 잘 대해 주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남자건 여자건 원래 다 친절한 편이다. 시골에서 우체국은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통로였다. 우리는 우체부 아저씨를 통해 신문도 받아보고 여러 가지 소포도 받았다. 심지어 우체부 아저씨를 통해서 우유도 받아먹고 짜장면도 시켜 먹자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하여튼 그녀는 춘향전의 고장, 남원에서 내가 자주 만나던 내 또래의 유일한 여자였다. 사람은 자주 만나면 뭔가가 쌓이는 것인가 보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지만 마주보고 대화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뭔가 호감이 쌓이는 것 같았다.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부치고 나면 그 아가씨는 내게 예쁜 글씨로 영수증을 만들어 주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영수증을 그냥 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체국에 갈 때마다 손에 쥐고 나오던 영수증에 사랑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늘 오후였다. 나는 집으로 책꾸러미를 부치러 또 우체국엘 갔다. 여느 때 같았으면 우체국장이랑 사무장이랑 같이 있어야 할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아저씨들은 아무도 없고 옆 건물인 보건소 아가씨랑 같이 앉아서 잡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에 보낼 책 보따리를 우체국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반복해 오던 의례적인 대화를 또 시작했다.

 

그 여자: 내용물이 뭔가요?

이 남자: 책인데요.

그 여자: (저울을 보더니) 7천 원입니다.

이 남자: 여깄습니다.

그 여자: 주소는요?

이 남자: 어쩌구 저쩌구요 등등.

 

이렇게 아는 사람도 없고, 외진 시골 마을에서 내가 자주 만나던 내 또래의 여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녀는 우체국 아가씨였다.

 

사실 나는 우체국에 그렇게 많이 갔으면서도 그 여자랑 우편물 발송에 관한 얘기 말고는 거의 다른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여자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지난 1년간의 그 지겨운 의례적 대화를 넘는 신선한 질문을 했다.

 

“서울에서 책을 보내 주면 보고, 다시 반납하고, 또 받아보고 그러시는 건가요?”

 

내가 요즘 들어 책꾸러미를 자주 소포로 날리니까 아마도 궁금했나 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자세히 설명을 해 줬다.

 

“그게 아니라 제가 이번에 다시 서울로 가게 됐거든요. 그래서 여깄던 책을 다시 서울로 조금씩 보내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 순간 내가 말하고도 나도 모르게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 이제 마지막이구나.’

 

나는 이번 주 안에 서울로 복귀하기로 했었고, 그래서 이곳의 일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녀와의 우편물에 관한 공식적인 대화가 사실상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머뭇거리며 우체국에 몇 분 더 있어 보려고 밍기적거렸다.

 

“우체국장님은 어디 가셨나요?”

 

그 여자랑 말을 좀 더 해 보려고 생각해낸 말이었다. 나는 사실 우체국장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고, 우체국장이 어디 가서 밥을 굶든지 구걸을 하든지 말든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냥 우체국에 좀 더 있어 보려고 해 본 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시내에 회의가 있어서… ”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지어낼 말이 없어서 그냥 나와야 했다. 내 발로 나오긴 했지만 떠밀리듯이 나왔다. 상황에 의해. 차를 타고 시동을 걸고 완만히 굽은 낯익은 시골길을 미끄러지며 다시 연수원 쪽으로 오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떠나야 하는가?’

 

스물네 살 때 첫사랑의 실패 이후 나의 교훈은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말을 걸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때의 교훈이 다시 생각나는 듯 했다. 운전 중에 다시 심각한 의문이 들었다.

 

‘이대로 떠나야 할까?’

 

그리고 나는 차를 세웠다. 그녀에게 뭔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럼 뭐라고 하지?’ ‘어떻게 하지?’하는 고민이 또 생겼다. 그때 내 눈앞에 영수증 한 토막이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소포를 부치고 그녀가 내게 전해 준 영수증이었다. ‘그래,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편물 사고가 발생하면 유가 증권으로 바뀔 수도 있는 영수증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영수증은 필요 없었다. 나는 영수증 뒷면의 흰 공백에 메모를 적었다.

 

“가다가 다시 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잘 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 시간 있으세요? 괜찮으시면 저녁이라도 사 드리고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연락을 부탁드려도 될지 모르겠군요. 제 전화는 017-225-3449, 멜주소는 홍자루 골뱅이 나우누리쩜넷입니다. 고맙습니다. 홍기표 드림”

 

나는 내가 쓴 메모를 몇 번 읽어봤다. 그리곤 다시 잠시 동안 머뭇거렸다.

 

‘좀 있으면 떠날 텐데… 이래도 될까?’

 

아무래도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영수증을 확! 구겨 버리려는 순간, 갑자기 뇌리를 때리는 충격적인 발상이 떠올랐다.

 

‘맞다! 이 동네는 춘향골이다!’

 

나는 구겨 버리려던 연수증을 다시 잘 폈다. 그리고 서둘러 시계를 보니 4시 58분! 동절기 퇴근 시간 2분 전이었다. 나는 급발진과 함께 핸들을 꺾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중앙선을 넘었다. 지난 1998년 운전 면허를 딴 이래로 수백 번이 넘는 불법 유턴을 감행했었지만 이번처럼 과감하고 획기적이며 기억에 남는 불법 유턴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우체국으로 돌아가는 차 안, 민주노동당 중앙 연수원 개원 이래로 계속 꽂혀 있는 김광석 테이프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부리나케 우체국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그 여자에게 영수증을 살며시 건넸다. 그리고는 “이게 뭐예요?”라는 질문의 ‘요’자가 끝나기도 전에 도망치듯이 우체국을 나왔다. 그 짓을 하고 우체국에서 도망나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운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저녁밥을 먹고 달빛을 보고 있노라니 나의 오늘 행동에 대해 만족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공공 근로할 때 만난 여자는 그 여자가 퇴근 시간 5분 전에 “낼부터 안 나올 거”라고 하는 바람에 말도 못하고 헤어졌고, 그 전에 방송 통신대 도서관에서 자주 보던 여자는 <더불어 숲>이라는 책을 전해 주려고 주려고 하다가 끝내 전해 주지 못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거였다.

 

메모인지 영수증인지 전하긴 했지만, 답신이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내 스스로 많이 발전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을 뿐이다. 원래는 우체국 갈 일이 몇 번 더 있었는데 오늘 그 돌출적인 영수증 사건 때문에 우체국 가긴 다 글렀다. 이제 무슨 염치로 또 거길 가나… 좀 멀더라도 전라남도에 있는 곡성군 우체국을 이용하는 수밖에. 

 

사랑에 영수증은 없다.

 

—–2003년 봄, 남원

 

<<광고>>



No comments
LIST

    댓글은 닫혔습니다.

위로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