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감옥과 한국 군대 그리고 우리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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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원재

 

-조직의 관성에 의해 너무나 쉽게 삼켜지는 개인성. 조직은 개인을 삼키고 바꾼다. 알게 모르게

-당하던 사람이 가하는 사람이 되고, 피해자는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가해자가 돼

-자신을 돌아보는 개인은 자기를 지킬 수 있고, 홀로 설 용기있는 개인들이 모이면 집단 바꿔져

 

 

미국에서 종종 맥주를 함께 마시는 중범죄자(Felon) 출신의 친구가 있다. 빈민가에서 자란 그는 10대 시절 갱 싸움에 얽혀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에게 종종 악명 높은 미국 감옥 이야기를 듣곤 한다.

 

‘프리즌 게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대중 매체에서 흔히 묘사되듯 미국 감옥에서 동성 수감자 간의 성교는 자주 일어난다. 그런데 이런 ‘프리즌 게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동성애라는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실제로 프리즌 게이의 상당수는 감옥 안에서는 동성간 항문 성교와 구강 성교 등을 하지만, 출소하고 나면 오로지 이성과만 성교한다고 한다.

 

성욕보다는 지배욕을 위한 행위에 가깝다는 거다. 감옥은 그 폐쇄적 집단 생활에 의해 특수한 집단적 규범이 생기게 되는데, 프리즌 게이는 그 결과물이다. 수감자들은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오면 이들을 강간한다. 특히 체구가 작은 이들의 경우 어떤 조직에 속해 있지 않으면 강간을 피하기 어렵다.

 

힘이 있는 수감자들은 이들을 강간하고, 나중에는 피해자들로 하여금 본인의 주머니 속자락이나 옷 끝자락 등을 잡고 항상 따라다니게 만듦으로써 소유물처럼 대한다고 한다. 이런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는 조직에 속하거나, 누군가가 시비를 걸 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하는데, 그래서 신입 수감자들은 종종 입소 시작부터 누군가 하나를 잡아 반쯤 죽여놓는다고 한다. 그로 인해 복역 기간이 늘어나더라도 차라리 가해자가 되어야 피해자 신세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데 교정 당국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피식 웃으며 답한다. 그들은 어차피 외부인일 뿐이라고. 교정 당국은 대개 ‘현실’이라는 논리를 들어 방관한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큰 사건이 일어나 외부에서 무언가 조치를 취할 때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 수감자 간의 룰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한다. 구원이 없는 이야기. 어딘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이야기를 곱씹다 떠올렸다. 군대의 기억이었다.

 

훈련소의 조교로 현역 복무를 했다. 당시 우리 부대에는 여러 내무반 부조리가 있었다. ‘~란 원래 그런 거다’라는 생각으로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나 확실한 건, 우리 부대는 ‘군대란 원래 그런 거다’라는 태도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부조리들이 많았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내가 갓 일병이 되었을 때쯤, 후임병이 외박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까지 동원한 끝에 그는 얼마 후 부대로 돌아왔고, 정신질환을 호소했다. 그렇게 그는 다른 부대로 전출했다.

 

모자만 벗겨두면 비슷한 또래의 애들일 뿐인데도. 이런 환경에서 자기자신을 놓으면 괴물이 된다. 그게 조직 유지를 위한 필요 요소라고 합리화하면서. 나는 그렇게 괴물로 변해가는 선임병들을, 또 동료 조교들을 너무나 많이 봤다.

 

잠을 재우지 않고 새벽에 다용도실로 끌려 올라가 내리갈굼을 당하던 날. 나를 비롯해 말단 몇 명이 남았을 때, 그는 내게 힘들다고 했다. 힘들다는 말은 무서운 말이다. 모두가 힘드니까, 가볍게 넘기기 일쑤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무게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그래서 아직도 종종 그의 말과 그의 표정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도 떳떳하게, 아니,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지만, 나는 그에게 어떤 괴롭힘도 가한 적이 없다. 선임들의 가혹 행위와 내리갈굼 속에서도 우리는 저러지 말자며 서로를 위로하곤 했다. 반복되는 내무반 부조리에서 이런 위로는 서로에 대한, 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무너졌다. 선임병으로서 내가 그를 지켜주지 못한 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는 나 하나 돌보는 데도 힘이 부쳤던 것 같다.

 

이 일로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 헌병 수사관이 와서 장병 하나하나를 조사했다. 익명 설문도 실시했다. 그러나 이 시기, 나는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바뀌는 건 없을 거라고. 폐쇄적인 조직의 관성이란 외부에서 어찌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다. 한두 달이 지났을까. 불안한 얼굴로 후임들에게 사과 비슷한 말들을 건네던 실세들. 지금 생각해 보면 한낱 애들이었던 그들이 다시 익숙한 관성에 몸을 맡기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짧았다.

 

다시 새벽에 다용도실로 집합이 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잔소리. 그리고 잔소리는 폭언이 되고, 폭언은 가혹 행위로 이어졌다. 이런 가혹 행위들은 항상 시범 연습 등 어떻게든 ‘업무와 관련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마치 이런 일들이 조직 유지를 위해서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조직에 속한 사람을 쉽게 물들인다. 당하던 사람이 가하는 사람이 되고, 피해자는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가해자가 된다.

 

군 시절 인생에 지침이 될 만한 좋은 배움을 많이 얻었지만, 그중 내 신념과 비슷한 형태로 자리잡은 것이 있다. 조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조직 내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다. 조직에는 무서운 힘이 있다. 조직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걸 넘어서서,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사고방식에 동조하게 만든다. 개인성을 회복할 수 있는 탈출구가 없는 폐쇄적 집단 생활을 하는 조직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개혁의 힘은 너무나 쉽게 관성에 의해 무너진다. 애당초 몇 명의 가해자만으로 생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다. 그래서 나는 내부에서 버티고, 인정받고,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렇게 조직의 관성 자체를 바꾸고자 했다. 그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면 조직의 생리가 바뀐다. 이등병이 일병이 되고, 일병이 상병이 되고, 상병이 병장이 되면서 나름대로 애를 썼다. 단순히 ‘짬’만 차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부단히 일했다. 그렇게 병사들과 간부들의 존중을 얻는 순간 나와 후임들이 생각했던 ‘옳은’ 방식은 곧 조직의 방식이 되었다. 그렇게 관성이 바뀌는 순간, 그게 개혁이었다.

 

감옥 이야기에서 군대의 기억까지. 이 생각의 편린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집단성과 개인성이다. 집단 앞에 개인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집단성, 내지는 조직의 관성에 의해 너무나 쉽게 삼켜지는 게 개인성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조직의 무서운 점이다. 개인을 삼키고, 바꾼다. 알게 모르게.

 

돌이켜보면 군 시절 가장 힘들었던 건 내무반 부조리나 업무 같은 게 아니었다. 나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한 저항. 개인성을 지키는 것. 그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선임병과 후임병의 절대적인 갑을 관계. 이보다 더욱 극단화된 것이 바로 조교와 훈련병의 관계다. 훈련소에서 한 명의 군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 자존감이 완전히 파괴된 훈련병들. 그들을 대상으로 조교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모자만 벗겨두면 비슷한 또래의 애들일 뿐인데도. 이런 환경에서 자기자신을 놓으면 괴물이 된다. 그게 조직 유지를 위한 필요 요소라고 합리화하면서. 나는 그렇게 괴물로 변해가는 선임병들을, 또 동료 조교들을 너무나 많이 봤다. 그들은 하나하나 피해자이며, 또 가해자이다. 미국 감옥의 그 지옥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 군대와의 유사성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떤 폐쇄적인 조직이 집단성에 의해 지옥이 되어갈 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그렇게 모두가 집단의 광기 속에 세뇌되어 갈 때. 외부에서의 개입과 도움은 필요한 일이지만, 일시적인 변화는 일으킬 수 있어도, 조직의 생리 자체를 바꾸는 근본적인 혁신을 이루어내지는 못 한다고 믿는다. 특히 감옥처럼, 군대처럼 조직 환경이 곧 개인의 삶이 되는 곳에서는. 그래서 나는 항상 개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자신의 도덕과 윤리와 정의를,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렇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 나는 이런 개인성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들이 자기자신은 물론, 이 사회를 지켜나간다고 생각한다. 집단성에 의한 타락을 막아서는 장벽들과 같은 존재니까. 그리고 이런 개인들이 힘을 합칠 때, 집단성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집단성에 의해 각각의 개인성은 너무나 쉽게 집어삼켜지지만, 이러한 집단성의 위험을 경계하고서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개인은 자기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집단에 맞서 홀로 설 용기가 있는 개인들이 모이면 집단이 바뀐다.

 

홀로 선 개인들을 억압하려는 집단적 행동에 생리적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다. 당연하게도 정치라는 영역에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다수가 말하는 것들을 따라 떠든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지적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 다수는 상식이요, 옮음이요, 정의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이 다수 여론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소수 여론을 자동적으로 악이라 규정한다. 내가 소위 얼치기 좌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다. 물론 유튜브 등장 이후 이런 일은 우파 진영에서도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다.

 

내가 양쪽에 욕을 먹으면서도, 굽히지 않는 이유다. 아무리 큰 집단이어도, 아무리 많은 수의 사람들이어도, 틀린 건 틀린 거다. 그런데 여기에 굴복하는 순간, 나 역시 개인성을 잃고 집단 속을 표류하는 아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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