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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아재
-드디어 군부정권 몰아내고 문민정부 들어서고 케텔이 하이텔로 바뀌면서 PC통신이 대중화
-초창기 학생인권단체의 활동가가 되다. 혼자만의 투쟁에서 실체와 세력이 있는 운동에 편입
-‘선생’이라는 억압적 존재에 대한 반감보다는 권력에 대해 투쟁하는 동지라는 기대감 가져

내가 다니던 학교에 전교조 사립노조의 혁명 영웅인 모 교사도 재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좌절 속에서 문학에 기대어 한편으로는 현실을 도피하며, 한편으로는 예술이야말로 의식 개조의 수단이라고 스스로 강변하며 맞이한 고교 시절은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나에게만 새로운 희망의 시기였던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군부정권을 몰아내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던 시기이자 케텔이 하이텔로 바뀌면서 PC통신이 대중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PC통신이라는 세계는 내게 새로운 투쟁의 장을 마련했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쌓여가던 학생 민중의 주권 의식 부재와 억압에 대한 무감각에 절망하던 나는 현실에는 없던 동지들을 발견하고, 토론의 장에서 논리로 학교의 기득 권력을 옹호하는 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음을 발견했다.
결국 그런 경험으로 이론이 문제가 아니라 민중의 뚝배기가 문제라는 엘리트주의 혁명 투쟁에 물들어갔다. 그러면서 학교 계급론은 너무 급진적인 이론이라 이 민중에게 들어가기 힘들겠다는 것을 인식하고 좀 더 민중친화적인 학생인권 개념을 주 논리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어느 새 우리나라 초창기 학생인권단체의 활동가가 되어 있었다. 물론 내면의 의식은 더 급진적이었지만 그나마 혼자만의 의미 없는 투쟁이 실체와 세력이 있는 운동으로 편입된 것이다.
기본 방향은 학생인권이었다. 한창 인권이라는 키워드가 뜨던 시절이기도 했고. <닫힌 교문을 열며> 같은 영화를 통해 학생 인민 자신들의 주체적 저항이 아름답게 그려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인권의 핵심 이슈는 기본적으로는 체벌과 두발·교복과 같은 일차원적인 의제들이 많기는 했으나 당시로는 그런 의제가 제기됐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었다.
‘세력이 있는 운동’의 세계를 접하면서 학교 계급론에서 좀 더 대중적인 인권론으로 위장하고 나니 학교에서도 기회들은 열렸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당대의 ‘민주화’ 감성이 충만한 학교였다. 서울에서 가장 공부 못한다는 1학군, 재단의 서자 학교라는 신분은 언더 도그마를 형성하기 좋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재단의 서자라는 위치는 학교에 대한 통제가 약한 사학을 만들어냈고, 그 곳에서 전교조 사립 노조의 혁명 영웅인 모 교사도 재직하고 있었다.
모 교사의 존재감은 묘한 동질감을 내게 만들어줬다. 특히 모 교사는 본인이 안기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는 훈장을 학생들에게 읊곤 했는데. 그 블랙리스트 폭로의 계기가 자신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리 학교 선배가 군생활을 하면서 그 블랙리스트를 보게 됐는데 존경하는 학교 은사님의 이름이 올라 있고 예상 도주로까지 들어 있는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아 폭로를 결심했다는 얘기다. 그 선배의 진짜 내면적 계기는 모르지만 모 교사가 명단에 들어 있었고, 폭로자가 학교 선배였다는 것은 실화였으니 ‘선생’이라는 억압적 존재에 대한 반감보다는 억압된 권력에 대해 투쟁하는 동지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모 교사 외에도 자기가 교장을 몇 번 쫓아냈네, 교직원 회의에서 젊은 평교사도 마이크 잡고 학교 방침을 바꿨네 등등 선생님들의 영웅담들은 나의 계급론을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은연 중에 뒤로 놓으면서 연대의 가능성도 모색하게 했다.
특히 나의 처지도 그에 영향을 줬는데, 나는 매우 혁명적이며 반체제적 사고를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고지식할 정도의 준법자였다. 품성론을 읽을 수준의 진성 운동권은 아니었고, 혁명을 위해서는 내가 흠잡힐 게 없어야 현 체제를 부정하는 내 발언의 정당성이 실린다는 인식 정도였다. 그런데 그 결과, 내가 다녔던 학교 분위기로는 약간 일탈이 가능했던 동복 상의 규정도 칼 같이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일제 단속할 때 외에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불편한 명함 규정까지 지켰다. 거기에 더해 성적도 그럭저럭 그 동네치고는 좋은 편이었으니 젊은 전교조 교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들은 겉으로는 학생인권에 우호적이었다.
물론 이런 학교의 분위기는 학생들에게도 ‘민주적’ 풍토를 만들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학생회 후보자는 당시 학생회 분위기로 할 법한 소리인 무슨 복지를 해주겠다 따위는 씹어먹고 학교와 상대하는 ‘강력한 학생회’를 만들겠다고 나오기도 했고. 학생회가 주도해서 학교의 교복가격 담합 의혹을 조사하기도 했다. 물론 전면에 ‘담합’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소위 가격 인하를 위한 시장조사 명분으로 말이다.
전체 분위기가 다소 민주적이었던 것에 비해 학생 민중 개개인은 여전히 의식은 부족했으나 일부 뜻이 맞는 동지들도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면 연합활동도 하고 대외 동아리에 가입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당시만 해도 학교 내 일진 선•후배들이 조폭 유입과 양성의 통로가 되듯이 각종 동아리 선•후배 관계가 운동권 유입 통로로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자의 경우가 서고협(전대협의 서울 고교 지부라고 생각하면 된다)이나 흥사단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었고, 후자가 탈춤, 풍물 등의 소위 ‘민족적’ 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에게도 학교 계급론은 소화할 수 없는 주장이었지만, 학생인권운동은 손 잡을 수 있는 존재였다. 이런 상황은 내게 더더욱 혁명의 가능성을 낙관하게 만들었다.
사회적으로도 비록 3당 합당을 거쳤지만 들어선 문민정부의 출범도 희망을 더하기에 좋았다. 드디어 군부독재의 시대가 종식되고,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등 개혁적 조치들이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성과를 냈다.
그러나 희망은 어디까지나 희망일 뿐 현실이 아니었다.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
어느 고첩 이야기#17 진실은 침몰한다(2)
어느 고첩 이야기#18 진실은 침몰한다(3)
어느 고첩 이야기#19 진실은 침몰한다(4)
어느 고첩 이야기#20 그 해 8월(1)
어느 고첩 이야기#21 그 해 8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