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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원
-미국 이민 가기 직전에야 처음 참배한 양화진 선교사 묘역. 고마움에 미안함에 저절로 눈물
-“제국주의 첨병 선교사”라 폄하하며 “고마워해야 한다”던 할머니 말씀 무시한 과거 늬우쳐
-생애 던져 희생과 헌신으로 대한민국 잉태하신 분들. 그덕에 우리가 시민 권리와 자유 향유
미국 워싱턴 D.C.로 출국하기 전날엔 아침부터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 했습니다. 명동에서 수선 맡긴 옷도 찾고, 병원에서 PCR 음성 확인서도 수령하고, 아내의 국제 운전 면허증도 만들고, 점심에는 제가 예약한 좋은 일식집에서 가족들과 여유 있고 즐거운 식사 시간도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명동으로 이동하던 차에서 저는 더 미룰 수 없어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저기… 우리… 바쁘지만 내일 비행기 타기 전에 오늘 양화진 선교사 묘역 좀 들러 참배하면 안될까?”
아내는 처음에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그곳에 가는 게 특별하고 중요한 일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일은 순조로웠습니다. 점심 전에 양화진으로 향했습니다.
제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어디 멀리 가거나 돌아올 때면 꼭 어른한테 먼저 인사드리는 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머니 당신에게 그 어른이란 아마도 부처님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말인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돌아가신 지금, 제가 가고 있는 곳은 제가 당신의 아들이 아닌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스스로 인사드려야 할 어른들을 찾고 그 어른들에게 가는 첫걸음인 것 같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은 놀랍게도 합정역 중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양화진은 고종의 명을 받은 홍종우에게 상해에서 유인 사살된 김옥균의 시신이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은 후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란 깃발로 내걸렸던 곳이기도 하죠.
양화진에 캠벨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매리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학당을 세웠다면, 컴벨 선교사님은 ‘여성을 아름답게 꽃 피워내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배화학당을 열었죠. 헬조선에서도 가장 지옥에서 살았던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그 여성들이 이름을 가진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화’를 지으신 분.
헐버트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1886년 스물셋 나이에 이땅에 오셨죠. 조선 이름 ‘할보’. 선교사님이 안 계셨다면 군밤타령과 아리랑도 서양 악보로 채보되지 못해 어쩌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신은 한글로 최초의 교과서를 만들고, 주시경 선생에게 제안해 한글의 띄어쓰기 맞춤법 쉼표 등을 도입하는 데 기여하신 분이시죠.
그런데 헐버트 선교사 묘비 앞에서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마움도 크지만 미안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제 나이 사십이 넘고 그것도 한국 떠날 때가 돼서야 이렇게 찾아오다니… 죄송했습니다.
민란과 착취 속에 지옥같던 조선 말기에 최고의 엘리트로서 전도 유망한 어느 귀한 집의 딸과 아들들이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무장한 예수님의 일꾼으로 이 헬조선을 찾아온 것입니다.
당신들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과 예수님의 사랑은 아마도 조선인들이 최초로 받아 본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사랑, 조선에서는 사랑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말씀도 없었습니다. 성결도 없었습니다. 구원도 없었습니다.

합정역 인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캠벨, 헐버트, 하디, 언더우드, 아펜젤러, 베델, 무어, 게일 등 선교사님들이 안식하고 계시다.
제가 헐버트 선교사님 앞에서 참지 못하고 흐느끼자 아내도 같이 울었습니다.
뒤돌아서니 거기에는 하디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울먹이며 목 메인 채로 아내에게 말해 줘야 했습니다. 1903년 원산 부흥 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을 일으키게 한 중요한 분이시라고.
“하디 선교사님은 조선인들이 처음에는 무지하고 성경도 모르고 전근대적인 미신에 빠져 복음 전도가 안된다고 탓했어. 그런데 기도 중에 자신이 오직 말씀과 성령의 인도와 그 능력에 따르지 않고 남의 탓을 했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예배 중에 조선인들 앞에서 자신이 오만했고 교만했고 실수했다는 걸 고백하고 회개했는데 진심으로 하신 거야. 그걸 보고 조선인들이 같이 눈물 흘리며 그것이 회개의 본이 되고 간증이 되어 놀라운 영적 부흥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지.”
그런데 이 영적 회개 사건은 단순한 일회성의 해프닝이 아니었습니다.
“월북한 길진섭 작가 말해준 적 있지? 그 분의 아빠가 길선주 장로님이었어. 1907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장로는 통한의 심정으로 흐느끼면서 죽은 친구가 부탁한 돈을 사취했다는 걸 고백하고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주겠다고 회개했어. 그런데 그게 신자들과 선교사들의 마음을 울리고 새벽까지 통성 기도로 이어지게 된 거야. 바로 이 평양 대부흥 운동의 씨앗이 하디 선교사님이 1903년에 원산에서 일으킨 성령의 기도 운동이었던 거야.”
북조선 평양에 세워진 김일성 부자 태양상은 그렇게 성령의 역사가 강림했고 평양 대부흥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로 그 평양의 장대현 교회를 허물고 세운 우상입니다. 그것은 역으로 북조선이 제거하고 파멸시키려 한 역사와 장소성이 바로 이러한 기독교 성령 운동의 역사와 장소의 증거라는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이 국권을 상실했어도 당시 선교사들을 통해 바깥 세상에 알려진 조선인들의 기도가 결국은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것이거든.
당시 기독교인들이 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희망이라 믿었던 건 일제와 병합같은 것이 아니였어. 유일한 희망이란 바로 교회였거든. 유일한 민족적 소망이 기독교에 있었고 예수님의 교회가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단일 기관이기를 원했던 것이지. 그 기도가 오늘의 한국을 만들게 된 것이라 생각해. 필립 제이슨이나 이승만도 모두 그 기도의 자식들인 거지.
선교사들의 노력을 통해 이러한 기도가 외부 세계에 알려지고 그 바탕에서 한국의 건국의 역사와 축복이 성립될 수 있었던 거지. 3·1운동도 당시 소수자들이었지만 결국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바탕에서 교회의 조직력으로 조직해 낸 민족운동이었던 거야.”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님도 아펜젤러 선교사님도 베델 선교사님도 무어 선교사님도 게일 선교사님도 계셨습니다. 어른들에게 차례로 참배했고 그분들이 조선에서 했던 사역의 헌신과 사랑과 복음과 기도가 한국이라는 신생 국가를 태어나게 한 모든 출발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운 기적의 역사에 대해 경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아이도 이곳에 데려 오자. 우리처럼 나이 들어 혼자 공부하다 깨닫고 나서 이렇게 외롭게 눈물 흘리게 하지 말자.”
할머니는 이승만 박사한테 고마워해야 하고 미군들과 양인 선교사들에게 항상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저는 좌파 사상에 빠져 그런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무식하게 독재자 이승만을 옹호하는 것이고 제국주의의 첨병인 선교사들을 비호하는 것이라 무시하고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을 사무치게 뉘우치며 회개했습니다.
6.25 건국 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이곳의 비석에 새겨진 총탄과 파편들의 상처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와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유교적 예법을 지키고 따를 겁니다. 제 아이들도 그렇게 가르칠 겁니다. 대한민국을 잉태한 건 단일 민족 따위의 서사가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선교사들이 자신의 전 생애를 던져 일으킨 국제적 사건이자 국제적 협업이었습니다. 그 핵심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 분의 사랑과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계시지 않지만 어머니 말씀대로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한국을 떠나니 어머니께서 흐뭇해 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셔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선교사님들과 어른들이 계셔서 지금의 한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한국이 있어서 지금의 제가 개인으로서의 권리와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내외는 출국 하루 전에 양화진에 들러 한국이 태어날 수 있도록 먼 조선 땅에 사랑과 복음을 전해 준 어른들에게 절을 올리고 한국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