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회담의 ‘조선독립’ 누가 넣었나

<<광고>>



¶ Ivy Lee

 

-1943년도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처리 결정. 첫 회담서 조선 독립이 문서상 처음 기록

-장제스는 만주땅을 중국에 반환하고, 조선에 대한 우선권 요구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

-‘요인 암살’ 김구 방식이 옳았는지, 미국 정계를 흔든 이승만의 외교력 방식이 옳았는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하고 이태리 반도까지 점령하자 연합국들은 1943년도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서 전후처리를 어떤식으로 할지 결정하였는데 루스벨트, 처칠 그리고 장제스가 만난 첫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이 처음으로 문서상 기록되었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적절한 방식을 통해 한국은 자유와 독립을 얻게 될것이다.)

 

원래 초안에서는 in due course란 말이 없었고 처칠이 워낙 이 문구를 좋아해 넣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연합국 3국은 왜 조선의 독립을 언급했을까?

 

조선의 독립이 언급된 1차회담의 의제는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이견이 많아 합의가 되지않아 주로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지가 주된 이슈였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의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는 게 골자였다.

 

중국의 장제스는 그 회담에서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 당연히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인 만주땅을 중국에게 반환하고, 더 나아가 청나라가 오래전부터 조선을 속국으로 삼았기에 조선에 대한 우선권을 요구하려고 했었을 것이다.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등(왼쪽부터).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이 언급된 이유에 대해서는 2가지 썰이 있는데 첫째가 김구가 영향력을 끼쳤다는 썰, 둘째가 이승만이 영향력을 끼쳤다는 썰이 있다.

 

첫번째 김구가 역할을 했다는것은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을 가기전에 김구와 만났고 김구가 조선의 독립을 강하게 어필하여 거기에 못이긴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합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판타지적인 생각으로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중국은 조선에 대한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싶어하여 자신의 영토 혹은 속국으로 만들고 싶어하였고, 장제스가 김구에게 군자금 및 김구 일행들의 생활비를 주고 있었던 상황이라 김구가 장제스에게 강하게 요청할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것이다. 따라서 김구가 카이로 회담에 영향을 끼쳤다는것은 정황상 받아들이가 힘이든다.

 

두번째, 이승만이 역할을 했다는것은 당시 이승만이 ‘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정치계 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으며 단기간 내에 미국의 여러 주요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으며 정계 인사들과 상당히 친밀도가 높았고 왕성하게 교류를 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625전쟁에서 정전협의할 당시에 대한민국이 원하는대로 휴전협상이 되지 않자 포로를 몽땅 풀어버려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간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이승만이 협상 주도권을 갖고 한미수호조약까지 체결한 협상능력과 뚝심으로 미뤄 짐작하면 카이로 회담에서 갑툭튀처럼 나온 조선의 독립은 미국과 친밀한 누군가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넣을 수 없던 문장이었을 것이다.

 

한 나라가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가지 활동을 할수가 있겠지만 쿠르드족, 팔레스타인처럼 무력과 테러를 일삼아 다른 나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사례는 거의 보질 못한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요인 암살을 위주로 한 김구의 방식이 옳았는지? 미국 정계를 흔들어 외교력으로 목적을 이룬 이승만의 방식이 옳았는지는 굳이 부연설명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광고>>



No comments
LIST

    댓글은 닫혔습니다.

위로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