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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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원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언급한 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일까

-이승만의 농지개혁 없었다면 산업화도 불가능. 우리도 남미나 필리핀처럼 됐을 것

-초대내각은 전부 독립운동가들. 공산주의에 대적하기 위해 군인·경찰 기용했을 뿐

 

 

586들에게 이승만은 금기적 존재이고, 그에 대한 언급은 곧 변절로 취급되곤 한다. 북한의 입장에서 이승만은 해방의 원흉이다. 문제는 비난하는 이들이 이승만에 아는게 없다는 것이다.

 

1.
최재형 후보가 이승만을 언급했다. 예의 거북해하거나 비난하는 반응들이 나온다.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언급한 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일까. 예전에 도올이 방송에서 이승만을 미국 괴뢰라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했다. 영향력 있는 학자가 공중파에서 이런 식의 갈등의 골을 파는 선동을 해서야 될 일인가. 당시 우리의 시세와 처지로 볼 때 미국의 추대가 아니었다면 정부가 만들어지기나 했을까? 이는 쏘련이 김일성을 추대한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2.
상해임시정부 초대 주석이었던 이승만이 미국의 괴뢰가 되어 마냥 미국 뜻대로 움직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의 ‘추대’도 아니었다. 미국은 노회한 이승만을 거부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자 국내 리더들의 합의에 가까웠다.

 

이승만은 6,25전쟁 뒤 1954년 미국 방문 의회연설에서 아이젠하워 정부의 대공산권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뒤이은 정상회담 때 아이크가 한일수교를 압박하자 이승만은 화를 내며 “내가 있는 한 수교는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화가 난 아이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그의 뒤통수에 “이런 고얀사람을 봤나”며 호통까지 쳤다 한다.

 

3.
아이젠하워의 미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승만을 탐탁치않게 생각해 몇번이나 제거하려 했지만 한국에 그만한 인물이 없어 놓아두었다. 6.25전쟁 때 미국의 승인없이 반공포로 27,000명을 석방해 미국을 화나게 했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조기 휴전과 미군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은 끝까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을 거부해 결국 휴전약정서 서명에도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4.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전 서명에 빠졌던 건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라서가 아니라 휴전 후 미군철수를 우려한 이승만의 고도의 책략 때문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없는 정전협정을 끝까지 거부해 결국 아이젠하워가 자신의 선거공약을 폐기하고 미군을 남겨두었다. 남침도 <애치슨라인> 때문에 생긴 오판이었는데 미군철수는 곧 남한의 공산화였다. 비록 친미주의자였긴 하지만 나라까지 팔아먹은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5.
이승만을 마냥 찬양만 할 수 없는 건 그가 스스로 만든 민주주의의 룰을 깨트리고 권력연장을 꾀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시대 상황을 보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긴 하다. 당시 남한의 상황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와 같은 역사와 문화, 똑같이 근대 국가를 만든 북한과 비교되어야 한다. 과연 대통령까지 하야시킨 우리의 민주주의가 권력을 위해 숙청을 밥먹듯이 한 북한의 전체주의와 비교나 되겠나.

 

6.
이승만의 최대 공적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농지개혁>. 예전에 페친 한 분이 왜 필리핀이 민주화 투쟁은 우리보다 앞섰는데 지금 왜 저렇게 되었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2차대전 이후 신생독립국가들이 왜 독재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발도상국 목전에서 좌절했을까? 그 핵심적 이유가 바로 이승만의 농지개혁에 있다.

 

7.
그 때 만약 토지가 일부에 독점되었다면 산업화도 불가능했고, 우리도 남미나 필리핀처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발전과정에서 독점이 일어났지만, 남미나 필리핀같은 일방적 독점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해방전후사의인식>을 펴놓고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해서 우리보다 낫다고 배웠는데, 집단농장이 무상분배인가 국유화지. 아직까지 그걸 믿는 이들이 많다.

 

8.
둘째, <국가의_노선>과 <민주주의의 정책과 형식틀>을 만든 것이다. 비록 본인 스스로 이 룰을 어겨 쫓겨났지만, 당시 시대 상황이라면 무력을 통해 권력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가 우리가 아는만큼 그런 일방적 독재자가 아님은 공산주의자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앉힌 것과 대한민국 사법의 아버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임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대를 이승만이 구축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굴 시켜도 했을 것이라는데, 당시 독립운동가로서의 도덕적 권위와 중심국가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국제정세에 능통했던 이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9.
김병로는 발췌 개헌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승만이 불만을 표시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며 자신을 임명해준 대통령에게 호령했다. 극악한 독재자였다면 그를 그냥 살려두었겠나. 북한이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셋째는 <교육개혁>이다. 국민학교 무상교육을 통해 해방후 78%였던 문맹률을 하야 전 22%까지 낮추었다. 교육개혁은 우리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반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슷한 시기 가난한 신생독립국 중 이런 무상교육읕 한 나라가 또 있었을까.

 

10.
그가 친일청산을 하지 않아서 지금 불의가 득세한다는 건 역사를 너무 가소롭게 생각하는 비주체적 주장이다. 역사란게 휘발유로 크레용 자국 지우듯 지워지는 게 아니다. 문재인의 아버지도 일정 흥남시청 농업과장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오해하는 것과 달리 이승만 초대내각은 전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다만 공산주의에 대적하기 위해 군인과 경찰을 기용했을뿐.

 

11.
그렇게 안했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북한도 정부와 산업기술자 등에 친일분자를 기용한 건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역사를 단절시킬 수 있나. 역사는 점點이 아니라 선線이고 면面이다. 그 시대만 따로 떼놓을 수도, 우리만 따로 떼놓고 볼 수도 없다. 연결성과 다면성으로 접근해야 된다. 내용도 모르면서 선동 당하지말고 직접 찾아서 확인해야 깨어있는 시민이지.

 

12.
물론 그의 공功이 더 큰지 과過가 더 큰지는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정도로 잘 알지도 못하고. 다만 ‘미국괴뢰’ ‘묘지 파내자’ 같은 극단적 왜곡과 선동을 해선 안될 일이다. 역사는 여러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더구나 ‘공功’과 ‘과過’는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존성을 가진다. 과와 공은 한몸이다. 과가 없으면 공도 없고 공이 없으면 과도 없다.

 

‘양민학살’도 지금의 시각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조건을 고려치않고 역사적 사실을 간과한 채 따로 분리시켜 평가하는것도 단순한 이분법에 불과하다. 다 떠나 잘났든 못났든 우리 역사다. 양쪽 모두 숭앙과 분괴의 극단적 감정을 삭이고 좀 더 덤덤하게 역사를 바라볼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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