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1세기 전 대한제국 망국의 풍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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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7년 고종 퇴위 이후 몇 년간 병탄 유예된 것은 일본 내 강경파-온건파 간 조율 때문

-1909년 통감부가 경찰 폐지. 기유각서 체결로 ‘한국의 사법권과 감옥사무 처리권’ 인수

-조선에 당분간 일본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 통치. 정치집회와 연설회 등 금지

 

 

데라우치 마다사케.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망했다. 1897년 10월 12일에 탄생한 지 13년도 안 되어 일제에 강점되었다.

 

1909년 초부터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논의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907년 고종 퇴위 이후 몇 년간 병탄이 유예된 것은 항일의병 투쟁 때문이 아니라, 일본 내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조율 때문이었다. 더구나 영국 · 미국 · 러시아 등 열강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병탄을 추진할 경우 악화될 국제여론도 큰 부담이었다.

 

1909년 3월에 일본 수뇌부는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했다. 4월에 총리대신 가쓰라와 외무대신 고무라는 일본에 일시 귀국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한국 병탄에 합의했다. 이어서 일본 각의는 6월에 이토를 경질하고 후임 통감으로 소네 아라스케를 임명했다.

 

7월 6일에 일본 각의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단행한다.’는 내용의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이 건에 첨부된 ‘대한 시설 대강’에는 다수의 헌병과 경찰관을 파견할 것, 외교 사무를 완전히 장악할 것, 많은 일본인을 이주시킬 것, 한국에 근무하는 일본인 관리의 권한을 확대할 것 등을 명시했다.

 

이윽고 통감부는 6월 30일에 경찰을 폐지했고, 7월 12일에는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한국의 사법권과 감옥사무 처리권’을 위탁받았다.

 

8월 14일에 한국 임시파견대 사령부는 남한대토벌실시계획을 세우고 9월부터 10월 두 달간 의병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는 사실상 호남 의병 대학살 작전이었는데, 이 작전에 일본군 2,300명과 군함 10척이 동원되었다. 이때 전사한 호남 의병이 420명, 체포나 자수한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일제는 체포된 의병을 해남-하동 간 도로공사에 강제 투입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 작성한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보고서’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의 옛날을 몽상하여 일본인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대토벌을 단행하여 뿌리를 뽑아, 일본의 무위를 보여주어 일본의 역사상의 명예 회복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그간 일본은 안중근 의거가 합병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 것처럼 설명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과 러시아 · 영국 등 열강과의 관계가 조율되자 병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는 1910년 3월에 러시아와 제2차 협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4월에 러시아는 병합을 승인한다는 의사표시를 했고 (7월에 제2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다), 5월에 영국이 한국의 병합을 승인했다.

 

그런데 일본은 미국의 동의를 받지 않았고, 병합 사실도 사전에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1905년 포츠머스 회담 당시 롱아일랜드 사사모어 힐 자택까지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한 청년 이승만이 “일인들이 장차 미국의 후환이 될 터이니, 지금 대한제국을 도와 일인들의 계획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서영희 지음, p 261-262)

 

한국 병탄에 필요한 국제적 조건이 조성되자, 일본 내각은 1910년 5월 30일에 2대 통감 소네를 해임하고, 일본 정계의 실력자이며 군부의 강경파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다사케(일본 육군대신 겸직)를 3대 통감에 임명했다. 이어서 6월 3일에 일본 각의는 ‘병합 후 한국에 대한 통치 방침과 총독의 권한 등’을 확정했다.

 

여기에는 (1) 조선에는 당분간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하여 통치할 것 (2) 총독은 천황에게 직접 예속하고 조선에서 모든 정무를 총괄하는 권한을 가질 것 (3) 조선의 정치는 최대한 간명하고 쉽게 해 나갈 것. 이 방침에 따라 정치 기관도 남겨두거나 폐지할 것(일제는 한국 병합후 대합협회는 물론 병합에 협력한 일진회까지 해산시켰다) 등이 포함되었다.

 

7월 23일에 데라우치가 서울에 도착했다. 데라우치는 즉각 모든 정치적 집회와 연설회를 금지시키고 신문 · 잡지도 철저히 검열했다.

 

< 참고문헌 >

o 서영희 지음,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역사비평사, 2019
o 이덕일 지음, 근대를 말하다, 역사의 아침, 2012
o 연갑수·주진오·도면회, 한국 근대사 I – 국민국가 수립 운동과 좌절, 푸른 역사, 2016
o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국근현대사강의, 한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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