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하릴없이 걷는 플라뇌즈(flane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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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미

 

-‘하릴없이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 일컫는 프랑스어 flaneur, 여성형은 flaneuse

-플라뇌즈의 원조라고 할만한 조르쥬 상드 “넓은 인도 따라 혼자 걷는 것은 축복”

-플라뇌즈로서 한 세상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는 생각

 

 

책을 읽다가 나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릴없이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프랑스어 플라뇌르(flaneur, 여성형은 flaneuse)가 그것이다.

 

“완벽한 플라뇌르는 인파의 한가운데에, 움직임의 썰물과 밀물속에, 일시적인것과 무한한 것에 둘러싸인 곳에 머물며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고 보들레르는 썼다.

 

나는 다소 정적인 플라뇌즈다. 한가롭게 도시를 거닐다보면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과 인파의 익명성 너머에 멀어지는 도시가 파닥파닥!내 발바닥 아래 잡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Flaneur는 불어사전 뿐만아니라 영어사전에도 있는데 같은 철자가 도버해협을 건너가면 사뭇 의미가 변질된다.영어로는 <게으름뱅이> < 놈팽이>를 뜻하며, 잘 해봤자 <한량> 정도로 쓰인다.

 

언어는 생각과 느낌의 집이라고들 한다. 책의 저자에 따르면 런던사람들은 심각하고 냉정한 태도로 거리를 걷는다. 또 미국인들은 아무 행선지나 목적없이는 거리를 싸돌아다니지 않는 경향성이 있다. 그런 영국인과 미국인 눈에 플라뇌르는 결코 이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뇌르는 자유롭고 느슨한 영혼들을 포용하고 그 살아가는 모습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진짜 프랑스적인 단어다.

한국어의 <한량>과도 구별되는데 도회적이고 감각적이며 남성적 특질에 갇히지 않는 면모가 플라뇌르에는 더 강하다. 또한 비단 산책의 습관뿐만이 아닌 인식과 삶의 자세를 포착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북한산과 도봉산도 좋았지만 숲길과는 다른 매력이 대로변에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맛보았다.

 

한 분야의 깊이에 빠지지 않고 갈래쳐지는 연쇄적 사실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경계를 넘나들며 전체의 상을 그려내는 눈을 가진 이가 플라뇌르라고 생각한다. 플라뇌르 옆에 플라뇌즈가 서기까지에는 여성들의 자유를 위한 내외적투쟁이 수반되었다. 

 

플라뇌즈의 원조라고 할만한 조르쥬상드는 “넓은 인도를 따라 혼자 걷는 것은 축복이다.”라고 했다. 파트론 없이 거리를 혼자 걷는 것은 ‘거리의 여자’라고 오해받고 위협받던 시절, 조르쥬상드는 그 축복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다소 과격한 방법을 썼다. 당대의 법에서 금지한 남장을 하고 자유롭게 걷는 기쁨을 누렸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여성적 특질을 감추고 사춘기 때부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바지를 고집하고 살아온 이유도 상드와 같은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과 동떨어진 채 도시를 탐색하는 은밀하고 초연한 관찰자’의 자유를.

 

고교진학을 위해 광주라는 대도시에 도착할 때부터 건물 사이 그늘을 밟고 쏘다니는 버릇이 시작되었다. 대학시절부터는 예사로 마포대교, 원효대교,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너다녔다. 상계동, 하계동이 아파트촌으로 덮이기 전, 아직 논밭으로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가슴이 답답하면 학교앞 자췻방부터 서울의 북쪽끝까지 걸어갔다오곤 했다. 북한산과 도봉산도 좋았지만 숲길과는 다른 매력이 대로변에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맛본 것이다.

 

싸구려 운동화에 감싸인 발바닥과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히는 나날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를 살아남게 했다.

무언가를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플라뇌즈로서 한 세상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지금은 한다.

 

정태춘은 노래 <북한강에서> 에서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빈거리를 생각하오”라고 썼다. 아직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골태생 정태춘에게 비친 80년대 중반 서울의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 정태춘씨가 서울도심을 걷다보면 다른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로수 그늘 아래 대로변과 삶의 애틋하고도 신산한 풍경이 엿보이는 골목길의 노래 말이다. 차가 아닌 두 발로 걷다보면 서울은 결코 텅비어 있지 않고 정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시의 진화는 건물과 기반시설의 진화뿐만 아니라 관계의 진화, 인간관념의 진화와 궤를 같이하여 이루어진다.

 

자동차의 등장과 팔차선, 십이차선 대로가 도시적 삶을 삭막하게 만들어왔다. 하지만 이제 삶의 리듬이 바뀌고 호흡이 바뀌는 시점에 와있다. 보행자와 자전거 위주의 교통체계가 자리잡아갈수록 조금씩 조금씩 도시는 생기있고 아름다워진다. 사람들은 동네 까페에서 마주치고 산책로에서 우연히 조우한다.

 

무인자동차가 등장하고 또 다른 교통수단이 설계되는 미래도시의 풍경은 또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고 일상을 꾸려가게 될까.

 

큰애의 시험이 끝났다. 어울리지 않는 모범적 학부모의 탈을 벗어던지고 내 본모습인 플라뇌즈의 길을 떠나야 할 오후시간이다. 장마가 북상하기 전에, 비에 잡히기 전에 떠나야 한다.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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