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부정부패 원흉은 다름아닌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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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임금이 언제 한자리라도 은택으로 제수한 적이 있었더냐? 이미 5만 냥을 바쳤단다”

-1년에 5개 군 바꾼 군수도 있었고, 1년에 5명의 군수 맞이한 군도. 결국은 가산탕진

“한국 국민이 가련합니다. 한국 황제와 같은 인간은 또한 처음 보는 인종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인종이었다. 한국민이 불쌍하다.”

민영환의 어리석음

1901년에도 매관매직의 풍조가 1894년 갑오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 심했다. 아무리 종친이나 외척 혹은 임금과 가까운 자라도 감히 한 자리도 은택(恩澤)으로 얻을 수 없었다, 관찰사 자리는 10만 냥 내지 20만 냥이었고, 일등 수령 자리도 5만 냥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서상욱은 민영환의 외삼촌이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군수 자리를 달라고 오래 전에 아뢰었는데, 고종은 “너의 외숙이 아직까지 군수 한자리 하지 못했단 말이냐?”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에 민영환이 다시 외삼촌 일을 아뢰자 고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잊을 뻔하였다. 곧바로 임명하도록 하겠다.”하고는 서상욱을 광양군수에 임명하였다.

 

민영환은 집에 가서 기쁜 얼굴로 어머니에게 “오늘 임금이 외숙에게 군수 자리를 허락하셨으니, 천은(天恩)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러자 그의 어머니가 실소(失笑)하면서 “네가 이처럼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란 말이냐? 임금이 언제 한자리라도 은택으로 제수한 적이 있었더냐? 어찌하여 너에게만 특별히 은덕이 미친단 말이냐? 내가 이미 5만 냥을 바쳤단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는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전라도 구례에서 순국한 선비 황현(1855∽1910)의 야사집 『매천야록』에 나온다. (황현 지음 ·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p 106-107)

 

군수 임기를 16개월로 정하다

1903년에 군수의 임기를 개정하여 16개월로 정하였다. 이때 군수를 임명함에 있어 금액의 다과에 따랐는데, 고종은 관직을 자주 팔면 돈이 많이 생긴다고 여겨 1년도 못 되어 금방 교체시켰다. 심지어 1년 동안에 5명의 군수가 교체된 군도 있었다. 돈을 바치고 임명된 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아서 부임하자마자 즉시 수탈을 일삼았고, 돈 주고 군수가 된 자가 파산하기도 하여 군수 자리를 사려고 하는 자가 점차 드물어졌다. 고종은 이 점을 깨닫고 마침내 기한을 16개월로 정한 것이다.

 

돈을 바치고 임명을 받은 자들은 이미 그러한 사실을 알고 부임하자마자 수탈을 일삼았으니, 조금만 늦춰지면 교체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친 돈이 워낙 많아 본전을 뽑을 수 없었다.

 

고종은 또한 교체할 사람을 살피어 부가 있으면 다른 군으로 발령하여 그 대가를 징수하였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1년에 5개 군을 바꾼 군수가 있었고, 1년에 5명의 군수를 맞이한 군도 있었다.

 

그러므로 부자로서 군수가 된 자가 몇 년 사이에 가산이 탕진되어 관직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차 드물었다. 고종은 이런 점을 깨닫고 그 기한을 16개월로 정한 것이다.

 

이때 기호(畿湖) 이북 지방에서는 백동전(白銅錢)을 사용하고 영호남 지방에서는 엽전을 사용하였는데, 백동전 1냥이 엽전 70푼에 해당되어, 영호남 지방에서 군수자리를 사는 사람은 서울에서 백동전을 상납하고, 시골에서 엽전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10냥이 실제로는 7만 냥이었다.

 

그리고 백성은 조세를 엽전으로 바쳤는데, 서울에는 백동전을 바쳐, 그 차익을 챙긴 것이 자기 봉급의 10배나 되었다. 그래서 영호남 지방의 군수 자리는 특별히 좋은 자리였다. (황현 지음, 위 책, p 138-139)

 

군수의 자리값

1903년에 내부대신 김주현이 면직되었다. 김주현이 임금께 올려 군수 70여 명이 새로 임명되었는데, 고종의 뜻이 중간에 변해 모두 면직되고 아울러 김주현 또한 교체되었다. 당시 군수 자리는 5,6만 냥을 바쳐야 했는데, 졸지에 자리를 빼앗겼으니 경향에 파산한 집안들이 속출하였고, 시전에서 어음을 쓴 자는 줄줄이 구속되었다. (황현 지음, 위 책, p 147-148)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의 탄식

1905년에 주한 미국 공사 알렌(1858~1932)이 체임되어 귀국하고 모건이 신임 공사로 왔다. 알렌은 1884년 9월에 의료선교사로 서울에 와서 민왕후의 조카 민영익을 서양 외과술로 살려냈고, 1887년에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한국공사관 고문으로 일했다. 1890년에 조선에 온 그는 주한미국 공사관 서기관, 총영사, 대리 공사 등을 역임하였고 1901년에 전권공사가 되어 1905년 3월 29일까지 근무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어보자.

 

알렌은 우리나라에 10여 년 동안 머물렀는데 귀국에 임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국 국민이 가련합니다. 내가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 다녀보고 위아래로 사 천년을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인간은 또한 처음 보는 인종이었습니다.” (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p 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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