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과 장기표와 노동자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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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표

 

-“우리 애가 살아있을 때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는데”

-실존보다 텍스트가 더 중요. 전태일 사건의 초기에 스물 다섯 장기표 역할이 바로 그것

-장기표의 첫 느낌은 공장에서 한 번도 보지 한 순결한 노동자의 모습. 구도자 같기도 한

 

 

1>
엊그제 찻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책꽂이에서 우연히 ‘전태일 평전’을 보았다. ‘서점을 하도 안 갔더니.. 이제야 개정판의 실제 책을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보니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과 조영래라는 정확한 저자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 후반부에 전에 없던 장기표의 발문이 적혀있었다. 80년대에 내가 보던 책 중에는 저자가 없거나 애매한 책들이 많았다. <전태일 평전>의 실제 저자가 조영래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내가 봤던 책은 심지어 제목도 전태일 평전이 아니라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었다.

 

2>
조영래는 어떻게 전태일 평전을 쓰게 되었나? 여기서 장기표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장기표는 1970년 전태일 분신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성모병원에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스물 다섯 살의 장기표가 그렇게 빨리 움직였던 것은 전태일 사건 몇 달 전 이미 서울법대생들과 <자유의 종>이라는 잡지인지? 삐라인지? 를 만들면서 이미 평화시장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기표를 만난 이소선은 “우리 애가 살아있을 때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는데 태일이가 죽고 나서야 찾아 왔구나!”라며 한참동안 전태일의 삶을 얘기해 주셨다고 한다. 이게 장기표가 나중에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라고 불리게 된 사연이다.

 

장기표는 이후 이소선 어머니로부터 좀 더 자세히 전태일의 삶에 대해 ‘인터뷰’를 받았고 대학 노트 여러 권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이 때 이미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저기 도피 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수배자인 조영래에게 이 자료를 넘겼고 본격적인 집필이 시작되었다.

 

이 정도가 내가 아는 대충의 스토리다.

 

3>
예수께서 몸을 던져 복음을 실천했다면, 사도 바울 같은 존재가 자료를 모으고, 편집해서 정리된 “텍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역사적 순간에 ‘실천’을 담당하는 사람이 자료 정리까지 자기가 다 하기란 어렵다. 그런데 아무리 역사적 사건이라 해도 그 사건이 ‘텍스트’로 정리-전파되지 못하면 당시의 감동적인 헌신이나 역사적 의미가 후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역사적 사건에는 반드시 책이건 문서건 뭔가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아는 역사란 세상사 수많은 사건 중에 ‘텍스트’로 정리된 사건들의 종합이다. 언어로 2차 가공되지 되지 못한 역사는 ‘역사’가 될 수 없다. 어쩌면 실존보다 텍스트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홍길동은 실존하지 않는 상태에서 ‘홍길동전’이라는 텍스트만으로 여론형성에 성공했다. 전태일 사건의 초기에 스물 다섯 장기표의 역할이 바로 이런 역할이었다.

 

4>
이로써 한국 노동운동은 순결한 탄생을 갖게 되었다. 미국 건국시기에 조지워싱턴이라는 순결한 영혼이 있어서, 미국정치의 아름다운 시작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이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한국에는 ‘노동운동’이 없고 노조만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본 마지막 노동운동은 알바노조였다.

 

4>
전태일 평전은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따지고 보면 나의 어릴 적 세계관은 이 책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전태일 평전>은 ‘노동계급’이라는 신성한 존재가 있다는 ‘환상’-그것은 환상이었다-을 심어 주었다.

 

물론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내 후배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전화번호 뒷자리가 1970인 사람이 있다. 나는 예전에 어디 가서 ‘자기소개’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전태일 분신하던 해의 노동절에 태어났습니다”라고 소개를 했는데 그러면 좌중에서 “이야~!”라는 감탄사가 나오곤 했다. 지금 보면 ‘그게 뭐라고?’ 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어쨌든 모두들 약간씩 미쳐있던 그런 이상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구로1공단에서 2공단 3공단 걸어 내려오면서 어디 취직해야 하는지? 공장게시판에 붙은 구인 공고를 쭉 읽으면서 내려오던 추억. 그게 다 이 책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나의 인생 정체성을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뭐가 되었건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5>
전태일 하면 “내죽음을 헛되이 말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그런 말들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전태일이 죽기 전에 혼잣말처럼 했던 “배가 고프다”는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용산도서관에서 전태일 평전을 다 보고 해질녁 남산을 내려오는데 나도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점심도 안 먹고 책을 보다가 느지막히 내려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때 생각했다. 나도 죽을 때 “배고프다”는 말을 하고 죽어야겠다고. 하지만, 실제 나는 그 뒤로 배고파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배가 고플 각오도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6>
나는 별명이 공수표다. 인생의 대부분이 언행불일치다. 스스로 생각하는 인생 정체성은 노동자이지만, 실제로는 가사노동 조금하는 것도 더럽게 귀찮아해서 엄마가 다 한다. 배고프다를 잠재적 유언으로 생각했지만, 맛집 찾아다니는 대열에 합류해서 놀러다니기 바빴다. 맛도 잘 모르는 주제에.

 

하지만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장기표는 실제로 항상 뭔가를 고프게 살아왔다. 사민당 때문에 장기표 선생을 실제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받은 느낌은 공장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순결한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약간 구도자 같기도 한.

 

그 사람이 정치적으로 되는 길을 걸었는지? 안 되는 길을 걸었는지? 그게 뭐가? 왜? 중요한지? 내 머리로는 모르겠다. 그냥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 역사적 실천이다.

 

버스 떠난 지 50년 넘었는데 뒤늦게 흥분하는 사람들, 버스는 반대방향으로 가는데 스물 몇 살 때 만든 고향에 안주하는 사람들, 하나도 존경스럽지 않다.

 

나는 장기표의 삶에서 ‘욕망의 공복’ 상태를 느꼈다. 세상사의 대안에 대해 늘 고민하고 실행하고, 누가 욕을 하건 말건 뭔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그래서 언제나 배고플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나의 소년시절, 내 머릿속에 내가 결코 실천할 수 없는 고매한 이상을 남겨준 사람.

 

나는 장기표의 노동자 친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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