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만들려는 노력이 불평등 심화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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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재

 

-누구는 재벌의 집안, 누구는 기초수급자 집안에서 태어난다는 점을 근거로 불평등 따져

-괜찮은 외모와 성격, 자긍심과 확신 심어줘. 타고난 재력보다 타고난 외모가 더 큰 영향

-평등 부르짖던 이들의 명백한 실패. 평등-불평등으로 세상 바라보는 것 자체 ‘웃기는 일’

 

 

많은 사람들이 타고난 재력을 근거로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누구는 재벌의 집안에서, 누구는 기초수급자의 집안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런데 생각해보면 외모라는 선천적 요소만큼 불평등한 것도 없다.

 

나는 키가 크다. 189cm다. 골격도 큰 편이라, 딱히 운동을 하지 않아도 운동을 한 듯한 체형이다. 얼굴도 이만하면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사실 모든 남자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지만서도). 나는 타고난 신체조건 덕분에 남들보다 수월하게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첫인상이 좋은 편이고, 괜히 해코지 당하는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대개 호의를 가지고 나를 대하고, 딱히 시비를 걸린 적도 없다. 무언가 부당한 일이 벌어지면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때가 많다. 이렇게 삶을 살아오며 억울한 일을 당한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자격지심이나 컴플렉스 등에 시달릴 일도 없었다. 성격이 비뚤어질 일이 잘 없었다는 거다.

 

인성, 내지는 자아. 이와 외모는 분명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다. 외모라는 기본 조건 때문에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고, 딱히 피해의식을 느끼는 일이 없으니, 대개 모든 상황을 호의를 가지고 받아들이며 원만하게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딱히 못난 성격은 아닌 편인지, 당장 함께 살 수 있거나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친한 친구들도 있고, 지금까지 이성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결혼도 분에 넘치는 사람과 했고. 사회생활도 잘 해온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사업체를 굴릴 때도, 업무능력을 인정받는 과정에서 외모와, 모난 것 없는 성격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삶의 궤적은 자기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확신을 심어준다. 그래서 나는 선천적으로 가지게 되는 자산으로서 외모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최상위층과 최하위층의 극단적 사례가 아닌 이상, 나는 타고난 재력보다 타고난 외모가 일반적으로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생 성공의 척도를 단순히 경제 자산의 규모로 잡지 않고, 인생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로 설정한다면 말이다.

 

인성, 내지는 자아와 외모는 분명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다. 외모라는 기본 조건이 좋으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실제로 돈이 아주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는데, 외모(키)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서, 이로 인해 성격이 비뚤어져있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이 본인 인생에서 느끼는 만족도보다 내가 내 삶에서 느끼는 만족도가 훨씬 클 거라 생각한다.

 

‘평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선천적 불평등을 악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정부가 나서서 이런 선천적 불평등을 바로잡아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고 공정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논의는 대중척 차원에서 항상 ‘돈’에 대해서만 머물러있다. 앞서 말했듯 ‘돈’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외모’가 압도적인 ‘불평등’을 유발하는 자산인데 말이다.

 

평등과 불평등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인생의 출발선을 다르게 하는 외모 역시 바로잡아야 할 악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어떻게 해야할까? 나를 붙잡아 다리를 잘라내서 대한민국 남성 평균 키로 맞추고, 반대로 키가 작은 남성은 신체 확장 수술을 해줘야하나? 잘생긴 사람은 성형수술을 통해 이목구비를 흐트려두고, 못생긴 사람은 성형수술로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만들어줘야 하나?

 

외모 뿐만이 아니다. 타고난 천재들의 경우는 어떤가. 뛰어난 두뇌, 혹은 우수한 운동신경을 가진 사람들. 정부가 나서서 이들의 뇌라도 수술해야 하는 걸까. 혹자는 ‘노력하는 것’ 역시 재능이라고 한다. 나 역시 일부분 동의한다. 공부든 일이든 미쳐있다 싶을 정도로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정도의 노력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타고난 무언가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싶을 때가 가끔 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정부가 바로잡아야 할 불평등이 아닌가.

 

세상은 원래 불평등하다. 이는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서민들이 재벌들을 바라보며 불평등하다고 촛불을 들 때, 운이 나빠 불과 몇십 Km 북쪽에서 태어난 북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사람들을 보며 불평등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불평등은 끝이 없다. 당연한 거다. 애당초 ‘평등’이라는 게 망상이니까.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같은 거니까.

 

경제적 평등만 이야기한다고 해도, 통계(지니계수; 2019년 기준)를 살펴보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장 평등한 나라다. 아시아에서는 가장 평등한 나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이 나라가 매우 불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불평등에 대한 호소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같다.

 

애당초 실현될 수 없는 완전한 ‘평등’을 실현가능한 무언가로 생각하고서, 정부가 나서서 정의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단죄하기 시작할 때, 인류는 항상 문제를 겪어왔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괜히 망했나. 모두가 가난해지는 방식으로 평등해져도,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했다. 아니, 악화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평등’의 이름으로 수많은 실책들을 벌여왔다. 지난 세기 구공산권에서 이미 검증되어버린 실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들에 의해 오히려 경제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무엇보다 기회의 불평등이 심각해졌다. 이 불평등은 정치인들의 멍청함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악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평등이라는 이상을 부르짖던 이들의 명백한 실패를 바라보며, 이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애초에 평등-불평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며, 세상의 당연한 이치를 처단해야 할 악처럼 만들어낸 허상이 바로 ‘불평등’이라는 점을.

 

게임의 룰은 바뀌지 않는다. 불평등은 세상 모든 것에 존재한다. 농구는 키가 큰 사람에게 유리하고, 축구는 발이 빠른 사람에게 유리하다. 그것이 게임의 룰이다. 이를 “평등”하게 바로잡겠다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문제만 생길 뿐이다. 세상은 불평등하고, 불평등은 도처에 존재하며, 이는 바로잡을 수 없다. 애당초 불평등이 곧 게임을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니까. 나라면 바뀌지 않는 그 룰을 저주하기보다는, 그 룰 속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무기를 갈고 닦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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