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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동식
-10.26과 서울의 봄은 포스트 박정희 시스템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한국 총자본의 요구
-신군부의 정치 경험 부족과 부마항쟁의 진압 경험, 호남 오해에서 기인한 비극이 5.18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회로 이전하는 변화관리 역할이 평화적 정권교체로 이어져
지난 6월 22일 여의도 생각 놀이터 하우스(How’s) 커피숍에서 진행한 2022 대선특별기획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 7인의 대통령』 연속 시리즈 가운데 전두환 편에서 발언한 내용입니다.
부담스러운 자리이기도 했습니다만,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이고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피해서는 안될 사안이라고 생각해서 용기를 내봤습니다.
유튜브는 1시간 3분 무렵부터 20분 가량 발언한 부분이고, 그 뒤로는 메인 발제자와 함께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아래의 텍스트는 원래 소략한 메모 형태였던 제 발언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원래의 발언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발언 내용>
오늘 제가 말씀드린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진영으로서는 우파의 입장에 서 있지만, 평가 방법론은 좌파적 진보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두환 평가에서 우선 가장 강조해야 할 것은, 일단 감정적이고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전두환 평가에서는 무조건 결론부터 내세우고 객관적인 평가는 그 결론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전두환은 나쁜 놈이다, 죽일 놈이다, 살인마다… 이런 결론을 내려놓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객관적인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국정 운영을 평가할 때 한국 총자본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해서 유물론의 관점 즉 앞에서 말한 진보적 방법을 동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사회와 역사를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우선 전두환에 대한 감정적이고 정치적인 평가를 좌우한 것이 5.18입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다른 모든 측면의 국정 운영 평가를 무력화하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고, 전두환과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래서는 냉정하고 팩트에 근거한, 과학적인 접근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을 재평가할 때 이 사건의 배경을 경제적 관점, 총자본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생깁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박정희 시스템에서 보다 유연하고 개방적인 거버넌스 시스템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한국 총자본 차원의 요구가 드러난 현상입니다. 그리고 10.26 자체가 그러한 총자본의 요구의 결과라고 봅니다. 박정희 시스템으로는 한국 자본주의의 유지와 확대 재생산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몇몇 개인이나 그룹의 요구라기보다 한국 자본주의의 총체적 요구가 결국 시대적 요청으로 드러난 결과라고 봅니다.
이런 대한민국 거버넌스 시스템의 이행 과정이 1980년 서울의 봄이었고 5.18이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이런 총자본의 요구를 대행하는 리더십으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즉 일종의 변화관리를 수행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신군부가 몇몇 정치군인들의 자의적인 그룹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총체적 요구를 대행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서울의 봄 당시 한국의 기업들과 고위 공무원, 지식인들이 이들의 역할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국민들도 신군부의 등장에 대해서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거나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변화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빨리, 혼란을 최소화히고, 가장 적은 비용으로 체제 이행을 완료하는 것입니다. 신군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신군부의 의사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유신 말기인 1979년 부마항쟁 진압의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경찰 병력으로 치안 유지가 불가능해지자 공수부대가 투입됐고 신속한 진압이 이뤄졌습니다. 여기서 신군부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신속한 진압에는 공수부대 투입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신군부는 직접적인 정치 경험이 별로 없었고, 기존 정치인들과의 교감도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존 정치권을 경멸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정치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치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군부 엘리트의 시각으로, 일종의 색안경을 끼고 정치를 이해하게 된 학습 경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신군부에는 DJ의 영향력 등 호남의 정서를 이해시켜줄 호남 출신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부마와 다른 광주의 분위기를 이해시켜줄 사람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부마에서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광주의 시위를 진압하려 한 것은 불을 끄려고 물을 끼얹는다는 것이 기름을 끼얹은 셈이었습니다. 또는 불을 끄려고 물을 끼얹었지만 불길이 너무 거세 더욱 화재를 키운 꼴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정치 경험 부족과 빈약한 정치 네트워크, 호남의 특수성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비극이 5.18입니다. 하지만 전두환 등이 의도적으로 광주시민을 학살하려고 한 결과라고 몰아가는 것은 건조한 진실의 파악을 방해할 뿐입니다. 무지는 노동자 계급에게 한번도 도움이 된 적이 없습니다. 이건 다름 아닌 칼 마르크스의 발언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격렬함이나 역사적 의미에서 부마항쟁이 5.18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은데 왜 상대적으로 덜 기억되고 의미가 더 낮게 평가되는가에 대해 불만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부마항쟁과 5.18은 단 몇 개월 차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부마는 박정희 체제의 붕괴로 역할을 다한 과거의 사건이 됐습니다. 반면 5.18은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87체제를 성립시킨, 현재형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현재 87체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5.18은 계속해서 현재형 사건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월남전의 경험이 5.18 진압에 미친 영향도 언젠가는 따져봐야 한다고 봅니다. 제 개인의 경험입니다만, 1985년 제가 20대 후반이던 시절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6인실 병실에 어떤 중년 남성이 계셨는데, 이 분이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비명을 지르며 악몽에 시달리시더군요.
뭔가 사연이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 분이 어느날 저에게 오셔서 “청년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시더군요. “전라도 광주”라고 대답했더니 이 분이 망설이시더니 “내가 5.18 때 광주에 진압군으로 간 사람이다. 그 전에는 월남전에 파병됐던 하사관이었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이때 충격을 받은 것은 시기상으로 우리나라의 월남전 참전과 5.18이 시기상으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의 연관성에 대해서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거든요.
저는 이 경험을 계기로, 월남전에서의 한국군의 진압 경험이 5.18의 잔인한 진압 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됐습니다. 이민족을 상대로 한 전투 경험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시위 진압에도 알게 모르게 반영됐을 거라는 짐작입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전두환 정권의 성격은 실은 5.18이 아니라 집권 이후 실행한 야간통금 해제, 연좌제 폐지, 컬러TV 방송 허용, 중고등학생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율화, 프로스포츠 시대 개막 등의 개방화 유연화 조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경제 정책도 보다 개방화 유연화된 체제를 지향했습니다. 한미은행 설립, 외국은행 영업활동 여건개선책, 금융실명거래와 금융자산소득에 대한 종합과세 준비, 예금 및 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폐지, 스왑제도 개선. 국내 시장 확대 개방, 단계별 수입자유화 추진방안, 특별법 및 관세법 개정, 한미통상협상, 무역거래법 폐지, 외무역법 제정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이런 정책적 결과의 누적이 90년대 초반 오렌지족의 등장이라는 사회적 변화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즉,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이고 억압된 분위기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회로 이전하는 데 있어서 전두환 정권이 일종의 과도기적인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평화적인 정권교체 역시 이런 전두환 정권의 정체성의 결과라고 봐야 합니다. 한마디로 정치/경제 시스템에서 박정희 시스템의 극복을 떠맡은 청소 대행 업자가 전두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전두환의 경제적 업적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입니다. 체신부 시절부터 한국의 정보화의 밑그림을 그려왔던 핵심 당사자의 증언에 의하면 행정망, 교육연구망, 국방망, 금융망, 보안망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은 사실상 세계 최초의 인터넷 서비스 컨셉이었다고 합니다.
빌 게이츠가 1980년대 중반에 방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시 빌 게이츠는 한국의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에 관심을 갖고 그 사업에 참여할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내한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존재감이 크지 않을 때여서 장관조차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 말기부터 전두환 정권 임기 내내 청와대에서 정보화 기획 실무를 맡았던 분의 증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보화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정보화의 씨를 뿌리고 가꾼 것은 전두환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박정희 대통령부터였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보수정권이 다져온 기반 위에서 DJ는 열매를 거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 가운데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경제에 대해서 말할 때 3저 호황이니 김재익의 경륜이니 하는 얘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가장 중요한 사업이 이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끌어올린 주요 산업(조선, 자동차 등)이 사실상 이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몰락도 사실 이 중화학공업이라는 거대한 사업을 시작해놓고 미처 수습하지 못한 탓이 컸습니다. 그 후유증이었다는 거죠. 전두환이 이를 정리했고, 이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의 핵심 먹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정밀하고 집중적인 조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발전설비, 건설중장비, 자동차, 중전기기 분야의 투자조정 조치. 2차로 전자교환기, 디젤엔진, 그리고 동 제련 부문 등이 그것입니다. 1981년 이후 비료, 해외건설, 해운, 조선, 섬유를 대상으로 한 ‘구조불황산업의 합리화’ 조치가 뒤를 이었고, 1985-88년 동안에는 6차례에 걸친 부실기업 정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국제그룹 등 56개 기업의 정리가 이루어졌습니다.
국제그룹의 해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많지만, 보다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측면에서는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이라는 거시적인 맥락이 존재했다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평가는 긍정이다 부정이다 측면을 떠나 아예 평가 자체가 금기시되는 상황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을 모셨던 분에게서 “전두환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명필”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운동권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했을 때의 반응이 좀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전두환을 명필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며 분노하더군요.
그 무식하고 잔인한 전두환과 명필이라는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 사실 자체를 억지로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도덕질 선비질이 팩트를 억압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아, 물론 전두환 명필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팩트 여부를 확인한 뒤에 판단할 문제이지 미리부터 예단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진실을 거부하는 심리 아닌가, 그게 과연 우리 모두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두환은 박정희 시스템의 극복과 포스트 박정희로의 이행을 맡은 정치인이었습니다. 박정희 시스템의 정치적 측면의 극복이 87체제의 성립이었고 그 측면에서는 분명히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의 바탕을 만든 것이 전두환의 업적이라고 봅니다.
다만 박정희 시스템의 경제적 측면의 극복은 실패했고 오히려 퇴행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이것이 1987년 체제의 어두운 그늘이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입니다. 전두환 체제가 시도했던 박정희 시스템의 극복이 절반 정도에 그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붙잡고 씨름해야 할 추후의 과제일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 나와서 발언한다니까 “그러다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이 끝장날 수 있다”고 경고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정치인이 할 말 했다고 해서 정치 경력이 끝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