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취법과 임진왜란이 보여준 조선의 한심함

<<광고>>



¶ 성만득

 

-납을 사용해 은(銀)을 추출하는 제련법인 회취법(灰吹法)을 함경도 단천 은광에서 개발

-중국 무서워 은광 폐쇄하고, 은 캐다 걸리면 강력한 처벌. 구더기 무서워 장 내다버리기

-일본은 조선의 회취법 가져다가 전세계 은의 1/3 생산. 부국강병 이루고 조선 침략까지

 

 

1. 연산군 9년 1503년 김감불과 김검동이라는, 양인과 노비에 불과한 자들이 다른 곳도 아닌, 무려 성상이 계신 어전회의에 나타남.

 

2. 이유는 이들이 납을 사용하여 은(銀)을 추출하는 새로운 은 제련법인 회취법(灰吹法)을 함경도 단천 은광에서 개발해내었기 때문임.

 

3. 이는 은광석과 납의 녹는 점이 다른 것을 이용하여 둘을 섞어서 열을 가한 후 털어내면, 납이 은광석의 불순물을 안고 흘러 내리면서 분리되고, 고체인 은만 남게되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한 것임. 심지어 현재에도 cupellation 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기술임. 기존의 은광석을 녹여서 그 속에서 은을 골라내야하는 방식에 비하면 생산량이 몇 배 이상 늘게 되는 아주아주 획기적 제련법이었음.

 

4. 그런데 신기술이면 신기술이지 그게 왜 임금한테까지 보고가 들어갈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는가가 궁금할 것임.

 

5. 이유는 조선이 금은 채굴을 국가적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

 

6. 조선이 국가적으로 금은 채굴을 막은 이유는 바로 우리의 역사상 영원한 주적 지나 때문임(당시 명나라).

 

7. 취약한 명분의 역성혁명으로 성립한 조선은 중국에게 형님형님하며 맹나라 응딩이에 매달리는데, 이런 절호의 삥뜯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나라는 조선에게 금, 은, 처녀 위주의 조공을 요구함.

 

8. 이들의 삥뜯음이 심해지자, 세종 애비 태종은 하다못해 금과 은은 조공 물품에서 빼달라고 앙망함(사람인 처자보다 금은을 더 중시하는 ㅈ선 클라스). 이때 태종은 조공으로 바칠 은이 없다는 걸 보이기 위해 조선에는 은광이 없다는 걸 구라치다 딱 걸리기도 했음.

 

9. 태종의 앙망문은 당연히 X까라며 씹힘. 황제에게까지 가지도 못하고 중간에 커트당할 정도였음. 앙망문은 후에 수백년이 지나 모 선생님에 의해 진정한 걸작으로 다시 탄생하나, 이때는 아직 앙망의 수준이 부족했었던 듯함.

 

10. 견디다 못한 아들 세종이 20년 뒤인 1429년 다시 앙망문을 씀.

 

11. 의외로 이번엔 쿨하게 명나라가 O.K 해줌.

 

12. 신난 조선의 세종은 이 때다 하고 아예 국내에 있는 금은광을 다 폐쇄해버리고, 전국적으로 금은 채굴 금지령을 내림. 태종 때 구라치다 개망신 당한 것도 있고, 혹시라도 명나라가 맘이 바뀌어 다시 내놓으라고 해도 금은이 없으면 배째라 할 수 있기에 한 병신같은 처사임.

 

13. 이게 어느 정도였냐 하면 심지어 조선의 법률집인 경국대전에 금은을 북경에 몰래 가져가서 파는 자는 사형이라는 항목이 있음.

 

14. 심지어 나라가 피폐된 임란 직후에도 선조는 함경도 단천 은광을 폐쇄하고 은을 캐다 걸리면 일가족 모두를 유배시키고 수령도 처벌한다는 령을 내림. 은을 캐서 그 돈으로 걸레짝 된 나라를 살려도 모자랄 판에, 명나라 눈치 보며 오히려 광산 문을 닫아버림. 구더기 생기는 게 무서워서 장들 다 갖다버리는 것과 똑같음.

 

15. 명나라도 명나라지만, 성리학 교조주의에 찌든 조선의 씹선비들은 더 했음. 이들은 금은을 캐면 농민들이 농사 안 짓고 상업에 종사해서 나라가 망한다는 철썩같은 믿음이 강해서 금은광이 발견될 때마다 사사건건 겐세이 놓음.

 

16. 따라서 씹선비 사대주의와 성리학에 의해 조선의 은은 그 가치를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함. 당시 금은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한 마디로 심각한 경제적 자살이었는데(왜인지는 곧 다룸), 이는 조선을 망조로 몰아놓은 결정적 삽질 중 하나임.

 

17. 어쨋든, 김감불과 김검동이 회취법으로 임금 앞에 불려갔던 때와 비슷한 시기인 1526년 스시국 이즈모(현 시네마현)에서 이와미 은광(石見銀山)이라는, 후에 생산량 세계 1위가 될 핵노다지가 발견됨(생산량 세계 1위가 된 이유는 좀 있다 설명). 발견시 오우치 가문이 침 발랐으나, 결국 부근 실력자 모리 가문에게 넘어갔고, 최종적으로 토요토미에게 바쳐짐.

 

일본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유적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18. 하지만 매장량에 비해 너무 부족한 제련술은 생산량과 품질에서 문제가 됨.

 

19. 이런 상황에서 스시국은 조선에 새로운 획기적 제련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됨.

 

20. 스시인들은 아예 조선으로 제련되지 않은 은광석을 싸들고 가서 돈을 주고 회취법으로 은을 생산하여 돌아가거나, 또는 그렇게 제련한 은으로 조선의 면포, 도자기 등 물건을 사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감.

 

21. 덕분에 조선에는 왜인들이 남긴 은이 넘쳐흘렀음. 1540년 중종실록을 보면 ‘왜은(倭銀)이 유포되어 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라는 말이 나옴.

 

22. 16세기 당시 은(銀)은 세계적 통화였음. 돈을 다루는 곳을 은행(銀行) 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음.

 

23. 당시 명나라만 해도 지정은제 + 일조편법으로 모든 세금을 은으로 받고 있었음.

 

24. 유럽에는 대항해 시대가 막 열려서 포르투갈, 스페인이 교황으로부터 전세계의 동반구, 서반구를 나란히 할양 받고 (Tratado de Tordesilhas, 1494) 열심히 땅 따먹기 하던 시절임.

 

25. 포르투갈은 응디 미녀 천국 남미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은광 찾아 그 은으로 명나라에서 향신료, 도자기 등 사가서 유럽에 바가지 씌워 팔아먹으면서 떼돈 벌고 있었음.

 

26. 일본도 질세라 동남아에서(일본은 이 때 벌써 동남아 진출함. 현 말레이지아 말라카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까지 있었음. 그것도 무려 500년 전에) 포르투갈 상인들과 교류하며 일본 물건 팔고 은을 받음.

 

27. 전세계가 같은 화폐로 열나게 교류할 때 조선은 여전히 물물교환식인, 박원숭이 좋아할만한 알흠다운 경제체제였음. 참고로 조선은 무려 200년이 지난 1708년 초반 숙종 때에 가서야 화폐도 아닌, 쌀로서 조세를 통일하는 대동법이 전국으로 시행됨. 그것조차 함경도, 평안도, 제주도는 제외됨.

 

28. 애니웨이, 이렇게 국내로 들어온 일본산 은을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가져가서 그 당시 선진물품인 명나라 물건들을 사서 돌아옴. 방식은 물건들을 은 상인에게 담보로 맡긴 후 그에 상응하는 은을 상인에게 빌려서, 그 은으로 명나라에 가서 상인이 원하는 물건들을 사오고, 물건들을 배달해 준 뒤에 맡긴 담보를 되돌려 받는 복잡한 중계 무역 같은 방식이었음.

 

29. 이것의 참 거지같은 점은 세계 최고의 은 제련술을 가지고도 국내의 은을 활용하지 못하고 (앞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에 은광이 없었던 것도 아님) 남의 나라 사람들이 조선의 물건을 사가고 남긴 은으로 명나라 물건을 사왔어야 했다는 점임.

 

30. 예를 들어 국산 은 10냥이 있었으면, 그걸 바로 지불하고 직접 명나라 도자기 사올 수 있는 것을, 굳이 x빠지게 면포 만들고(면포 원자재, 노동력 투입), 그걸 또 일본에다 팔아서 은화 받아 은 장사꾼을 통해서 명나라 도자기 사오는 것임. 참으로 병신 같다 아니할 수 없음.

 

31. 어쨌든 이 꿀 떨어지는 이 제련술을 보고만 있을 일본인들이 아님. 당연히 꼬드겨서 회취법을 일본으로 가져감 (산업 스파이 ㅍㅌㅊ?).

 

32. 일본 기록 긴산규기(銀山舊記) 에 따르면 이와미 은광이 발견되고 7년 뒤인 1533년에 이와미 은광을 찾아낸 가미야 주테이가 종단, 계수 두 명의 공돌이와 함께 회취법을 시작했다고 나옴.

 

33. 논란은 있지만 종단, 계수라는 두 명의 공돌이는 조선인이라는 게 정설임. 성씨도 없는 것을 보면 노비라는 것도 추정가능함. 기능인 개차반 취급하는 조선의 유구한 역사는 이 때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것임.

 

34. 1539년 중종실록에 보면 ‘전주 판관 유서종이 왜노와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납)을 많이 사다가 자기집에서 은을 만드는가 하면 그 방법을 왜노에게 전습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하다’라는 기록이 나옴.

 

35. 즉, 조선, 일본의 기록상 회취법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는 게 맞음.

 

36. 회취법 시작 후 이와미 은광은 당시 세계 1위였던 포르투갈이 가진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을 제치고 순식간에 생산량 세계 1위로 등극함.

 

37. 뿐만 아니라 회취법이 일본 전역에 퍼져서 일본에 일종의 은광 러쉬가 일어남. 마치 1849년에 일어난 미쿡 캘리포냐 골드 러쉬와 비슷함.

 

38.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17세기에는 일본의 은 생산량은 전세계의 1/3 가량를 차지할 정도(~150톤)까지 올라감. 비유하자면, 현재 기준으로 전세계 석유의 1/3이 일본에서 나오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됨. 그 석유(은)로 온갖 다른 물건 사거나 만들 수 있는 건 당연. 한 마디로 순식간에 세계 최고 부자 나라 중 하나로 등극함.

 

39. 유럽 나라들 같이 식민지 따먹고 착취하면서 힘들게 얻은 은도 아니고, 노다지 은광 하나와 옆나라에서 버린 신기술 하나 줍줍해서 대박난 것임.

 

40. 다시 16세기 초로 돌아감. 이 때, 일본은 똥남아 말라카의 집단 거주지를 중심으로 포르투갈 상인들과 활발히 거래 중이었음.

 

41. 1543년(1543년을 잘 기억해 둘 것. 뒷부분에서 또 다룰 것임), 말라카에서 닛폰과 거래하던 포르투갈 배 한 척이 아예 일본까지 감. 가고시마에 있는 다네가시마에 도착했는데,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에게 길쭉한 쇠 막대기 같이 생긴 요상한 물건 2개를 건네줌.

 

42. 이들이 건네준 물건이 바로 철포(뎃포), 또는 조총이라고 불리는 물건임.

 

43. 포도아(포르투칼)人 모랑숙사(안토니오 다 모타)가 시범을 보이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나며 은산도 부수고 철벽에 구녕도 낼 수 있을 정도의 위력에 모두가 지려서 철포라고 이름 붙인 것임. 일본식 발음으로는 뎃뽀인데, 아무 준비 없는 상태란 말인 무대뽀란 말도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임.

 

44. 철포의 위력에 지렸으나, 그 잠재력을 놓치지 않은 다네가시마 도키타카는, 호갱님 인증하며 그 자리에서 아~주 비싸게 2자루를 구입함(한창 야동 볼 나이인 15세에 철포를 도입한 선지력 ㅍㅌㅊ?)

 

45. 한 자루는 가문의 대장장이인 야이타 킨베에에게 역설계를 명하고, 다른 한 자루는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인데, 내 어찌 숨겨놓겠는가”하며 대인배답게 무로마치 막부에 헌상함. 이 때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나이는 겨우 15세였음(15세 때 만화나 보고, 야한 생각만 하던 본인 포함 대부분 아재들 자살각).

 

46. 그것도 부족해 상남자 도키타카는 역설계로 찾은 조총 제조법을 그냥 풀어버림. 서로서로 잡아먹던 전국 시대다 보니, 너도 나도 만들게 되고 그 결과로 불과 약 10년 뒤 일본에 생산된 철포의 수는 30만 정이 넘어감. 이 수는 유럽 전체의 총기 수보다 많은 것임.

 

47. 참고로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군인 핀투는 동방편력기에 “붕고국에 있는 상인에게 철포가 3만 정이 있다고 들어서 깜짝 놀랐다. 일본 전역에 30만 정이 넘고, 류큐 왕국에만 판 것도 2만5천 정이 된다고 했다. 그 짧은 기간 이렇게 많은 총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라는 기록을 남김(1556년).

 

48.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고를 지향하는 일본답게 철포 제작에도 온갖 유파가 등장함. 예를 들어 구니모토 지역이 철포 생산지로 유명했는데, 1549년 고작 15세인(다시 한 번 우리 모두 자살각) 오다 노부나가가 구니모토에서 500정을 구입해감.

 

49. 잘 알다시피 26년 뒤인 1575년에 이 철포로 오다 노부나가 연합군은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문을 멸문시키고, 히데요시는 1589년 호죠가 오다와라 정벌을 끝으로 일본을 통일함.

 

50.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철포 전술이 사용된 나가시노 전투 후 불과 17년 뒤인 1592년에는 일본은 조선까지 쳐들어가는데, 그게 바로 임진왜란임. 철포가 처음 일본에 전해지고 불과 39년 뒤, 회취법이 일본에 넘어간 지 59년 만에 조선은 임금이 왕자들까지 버리며 명나라에 망명을 고려하면서 똥꼬 빠지게 토끼는 신세로 전락함.

 

51. 철포도 철포지만 도자기랑 직물, 제련 등 모든 면에서 조선에 뒤쳐진 기술을 가졌던 일본이 순식간에 30만 정의 조총을 만들고 1만 척의 세키부네를 만들 정도의 그 국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를 생각해야 함.

 

52. 원조 원숭이 히데요시는 회취법을 득템한 이와미 은광에서 나온 은으로 문록석주정은銀 이라는 은화폐를 만듬. 전국 통일로 인한 전쟁 중단과 단일 화폐 경제 하에서 일본의 경제는 성장하고, 히데요시는 이를 통해 철포 등 무기와 세키부네 같은 군선을 조달함. 참고로 임진왜란 때 건너온 군선만 1만 척 가까이 되는데, 그 돈은 다 일본이 캐낸 은에서 난 것임.

 

53. 즉, 조선이 버린 제련술이 일본에 건네져서 이와미 은광 같은 노다지와 시너지를 일으켜 큰 부가 되고, 이렇게 쌓은 부를 통해 되어 전국 통일, 임진왜란으로까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임.

 

54. 이렇게 조선은 세계 최고의 제련술을 죽쒀서 남주는 개삽질을 함. 안타깝지만 이런 희대의 병신짓이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도 아님.

 

55. 하긴 뭐,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을 죽여 먹던 극한의 기아 속에서도 백성 구제할 물자를 전용하여, 본토 중국에서조차 옛날에 사라진 무려 1000년 전 성리학 창시자 주자와 그 거지같은 성리학을 반도로 가져온 안향을 기리는 서원을 백운동에 세우던 뭐같은 나라니까 뭐 이상할 것도 없음. 풍기 군수 씹선비 주세붕은 백성들 굶어 뒤지는 와중에 조선도 아니고, 중국 선비 경배용으로 경북 영주에 기어코 백운동 서원을 세움. 이는 후에 노론의 본당이 되며 씹선비 양성소로 그 역할에 100% 충실함.

 

56. 참고로 이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후에 명종한테 사액 받아 소수서원이 됨) 세워진 해가 바로 일본에 처음으로 철포가 들어오던 1543년임. 이 후 약 400년 동안 서원들은 조선의 씹선비 양성소로서 충실한 역활을 하며 나라를 철저하게 망국으로 몰아감.

 

57.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이와미 은광의 팜플렛에는 天の惠 地の寶 人の技 라는 글귀가 있음. 뜻은 하늘의 은혜, 땅의 보물(은), 사람의 기술(회취법)임. 즉, 회취법이라는 기술이 없었다면 이와미 은광의 가치는 훨씬 낮았을 것이라는 걸 일본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뜻임.

 

58. 결과적으로 조선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 이 은혜, 보물, 기술은 조선이 사대주의와 성리학 유교 탈레반으로 정신승리하면서 삽질하는 동안 모두 다 일본의 것이 되어 조선에게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의 치욕으로 돌아옴.

 

59. 조선의 일본에 의한 멸망은 수많은 기회를 놓친 자업자득.

 

60. 지금의 문재앙 사태도 자업자득. 역사에 수많인 교훈이 있으면 뭐하나. 배우지도 써먹지도 못하는데.

 

•참조: 박종인의 <대한민국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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