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를 꼭 목에 걸고 싶다는 후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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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수

 

-1년차 전공의들에게 OB 선배들이 청진기 선물해주는 전통. 나도 10년쯤 전에 받았는데

-“저기 폴대에 실습학생용 싸구려 청진기 있지? 저걸로 충분하다. 비싼 청진기 필요없어”

-그들은 결국 청진기를 택했다. 꼭 목에 청진기를 걸어야 의사처럼 보인다니 어쩌겠는가?

 

 

우리는 1년차 전공의들에게 입학기념으로 OB 선배님들이 청진기를 선물해주는 전통이 있다. 나도 10년쯤 전에 받았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 OB들이 청진기를 준비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청진기라. 뭔가 부적 같은 건가?’

 

나는 필사적으로 선배를 설득했다. 요즘 누가 청진기를 쓰냐고. 그 돈으로 다른 유용한 걸 선물해주라고. 내 유려한 화술에 홀라당 넘어간 선배.

 

“그렇다면 비슷한 가격대에서 원하는 걸 말해봐!”

 

나는 기쁜 소식을 전공의들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아뿔싸. 전공의들이 청진기를 갖고 싶단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또 다시 필사적으로, 이번에는 전공의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 지난 1년간 청진기 쓴 거 손에 꼽는다. 응급실에서 청진기 쓸 일이 뭐가 있냐? 고작해야 콧줄이 제 위치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정도? 근데 그럴 때는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거 아무거나 주워서 쓰면 돼. 어차피 꾸륵하는 소리 한번 들으면 끝이니까. 예를 들면 저기 봐봐. 저기 폴대에 청진기 걸려있지? 응. 맞아 실습학생용 싸구려 청진기. 그래 저걸로도 충분하다고. 비싼 청진기 필요없어.”

 

“환자 볼 때 청진 안하냐고? 응. 안해. 청진은 진짜 고수들이나 하는 거야. 너나 나 같은 어중이 떠중이에겐 아무 도움도 안돼. 그럼 어떡하냐고? 아니 세상이 좋아졌는데 뭐가 걱정이야. 초음파가 있는데. 폐부터 심장까지 어지간한 응급, 중증질환 감별에 초음파는 청진기에 비할 바가 아니거든?”

 

쟤들 2년차 되기 전에 100% 확률로 청진기 잃어버린다는 데, 내 남은 가오를 모두 건다.

 

“긴장성 기흉은 청진으로 진단하는거 아니냐고? 이 새끼 공부 많이 했네. 근데 말야. 교과서상 맞는 얘기긴 한데. 현실도 그럴까? 너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확신이 들 거 같냐? 다시 얘기해보자. 이 시끄러운 응급실에서 소리로 구분하는 게 과연 쉬울까? 각종 모니터들 알람도 최대로 키워놔야 겨우 알아채는 환경에서. 그거 들으려면 소음 차폐가 아주 잘 되는 비싼 청진기가 필요할 걸. 그런데 고작 1년에 한두 번 볼까말까한 긴장성 기흉을 위해 비싼 청진기를 날마다 들고다닌다고? 근데 그거 아냐? 초음파로도 기흉 진단 엄청 쉽다는 거. 10초 컷!”

 

“어쩌다보니 내가 초음파 예찬론자가 된 거 같긴 한데. 맞아. 나 초음파 겁나 찬양해. 항상 옆에 달고 살면, 응급실에서나 중환자실에서나 이것만큼 유용한 게 없지. 시대가 변했잖아. 비단 초음파뿐만이 아니야. x-ray도 마찬가지야. 물론 고수들은 x-ray만 있어도 환자보는 게 가능하지. 우리 교수님들 화면에 흉부 x-ray 한 장 달랑 띄워 놓고 이 질환 저 질환 감별하는 거 보면 진짜 신기할 지경이긴 해. 근데말야. 어차피 너나 나는 고수가 아니잖아. 어중이떠중이 의사잖아. 그럼 어째야 해? 장비빨이라도 받아야지. CT, MRI, US를 이용하면 된단 말이야. 고수들이 x-ray 한장 놓고 날고 기어봐야 내가 CT 검사 한번으로 얻는 정보량이 훨씬 더 많다고.”

 

“돈은 거짓말 안한다. 청진은 공짜지만 초음파는 돈이 들어. x-ray는 저렴하지만 CT는 비싸고. ‘대한민국, 대학병원, 응급실’ 우린 다른 의사들보다 굉장히 유리한 장소에서 진료하는 거야. 고가의 검사들을 거리낌없이 남발할 수 있으니까. 아니 죽을 지경이 되어서 여기까지 흘러온 환자들을 보는건데, 돈 좀 더 들면 어때? 살리는 게 중요하지. 여긴 명의가 되기 아주 쉬운 구조야. 너희도 앞으로 자뻑하는 날이 무수히 생길 거다. 하지만 착각하면 안돼.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고, 너희 실력이 뛰어나서도 아니니까. 그저 너희가 서 있는 장소가 너흴 명의로 만든 것 뿐일 테니까.”

 

“아무튼 결론은 시대가 변했으니 청진기는 이제 좀 내려놓아도 된다는 거야. 차라리 타블렛 패드 같은 거 사달래서 PDF로 논문을 다운받아서 읽든가.”

 

이렇게까지 설득했는데 전공의들은 결국 청진기를 택했다. 꼭 목에 청진기를 걸고 다녀야만 의사처럼 보인다니 어쩌겠는가? 가오가 중요하다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쟤들 2년차 되기 전에 100% 확률로 청진기 잃어버린다는 데, 내 남은 가오를 모두 건다. 그놈의 청진기. 나도 잃어버렸거든. 이미 몇개나…

 

근데 내가 가오가 남아 있긴 하든가? 삭감당하느라 남은 게 없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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