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잃어버린 50년과 북핵과 중국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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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욱

 

-조선이 제국주의 피식민의 나락으로 떨어진 역사 앞에는 50년 이상의 전조(前兆) 뚜렷

-1860년부터 50년. 조선이 개혁하고 자강하여 독립과 근대화 이룩할 기회 적지 않았다

-북핵·중국몽이 한반도 남쪽 오천만 거주민에게 드리운 미래 제대로 전망하고 대비해야

 

 

86운동권의 상징적인 인물인 함운경씨가 페북글을 통하여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https://www.facebook.com/nemo8845/posts/5777831482258654

 

동의합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는 이유는 미래에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것. 우리가 진정으로 살펴보아야 할 역사는 오히려 1910년 식민지로 되기 전 50년 동안의 <조선의 잃어버린 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860년,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의 상황이 제국주의적 경쟁과 약육강식의 질서로 변모된 것임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사건들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조선이 우러르던 종주국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속절없이 패배하여 베이징까지 점령당하였고, 황제 함풍제는 열하로까지 피신을 하여야 했습니다.

 

청나라의 여러 번속국(藩屬國) 가운데 오직 조선만이 열하로 피신한 함풍제를 위로하기 위한 사신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의를 지킴과 함께 중화천하질서에 변고가 생기는 현장을 목도하였더랬습니다.

 

남쪽 일본으로부터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英佛俄美) 등과 불평등조약을 내용으로 하는 수교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서신이 조선의 조정으로 전달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두만강 건너편에 부동항을 찾아 남하를 추진하는 러시아가 등장하여 서로 국경을 함께하게 되는 변화를 맞게 된 것도 바로 1860년 같은 해였습니다.

 

북핵 너머에 ‘6.25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에 조선을 도운)의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시진핑의 중국몽이 있습니다.

 

<6.25>는 발발 전날까지 평화운운의 공세 중이었다가 새벽에 느닷없이 전면적으로 밀어닥쳐진 것이었지만 조선이 제국주의 피식민의 나락으로 떨어진 역사 앞에는 50년 이상의 전조(前兆)가 있었던 것입니다. 1860년의 여러사건을 계기로, 청나라가 양무운동으로 나아가고, 일본의 명치유신이 본격화되어 갈 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모래더미에 머리를 쳐밖은 타조마냥 눈에 보이지 않으면 위험은 없는 것이라는 식이었습니다.

 

1860년에서 1910년까지의 50년 동안 조선이 스스로 개혁하고 자강하여 독립과 근대화를 이룩할 기회는 적지 않았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1885년부터 1894년까지의 10년, 그리고 1895년부터 1904년까지의 10년. 이 20년의 시간이 헛되이 된 것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불러들인 청나라의 조선주둔군 4,000명 및 일본의 군대는 1885년 텐진조약(天津條約, 아래 내용)으로 모두 물러가게 됩니다.

 

•청(淸)은 조선에 주둔시켰던 군대를 철거시키며 일본은 조선에서 공사관(公使館)을 호위하던 군대를 철거시킨다.

 

•양국은 서로 조선 국왕에게 권고하여 군사를 훈련시켜서 자체로 치안을 유지하게 한다… 이후에 청일(淸日)양국은 서로 조선에 사람을 파견하여 훈련시키지 못한다.

 

•앞으로 조선국에 변란과 중대한 사건이 생겨 청일(淸日 양국이나 혹은 어느 한 나라에서 군사를 파견하려고 하면 우선 서로 공문을 보내어 통지하며, 사건이 안정된 후에는 곧 철거시키고 다시 주둔시키지 못한다.

 

청일(淸日) 간섭의 군사적, 물리적 근거가 사라짐으로써 열려진 자율적 공간은 10년이라는 참으로 긴 시간이었지만 고종의 매관매직과 재정낭비, 민씨일족의 가렴주구 등 내정파탄과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이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거제도 점령을 자초하는 등의 갈팡질팡한 대외관계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의 지배력이 노골적으로 관철될 위험에 닥쳤지만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조선에서 퇴거하게 됨에 따라 조선과 고종은 다시금 자강과 독립의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전혀 변화하질 않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개혁요구에 귀닫고 탄압만을 자행한 끝에 나라는 힘을 잃어 1904년 러일전쟁의 전후처리대상으로 전락하여 조선의 외교관계에 관한 의사결정권이 고종 등 조선조정이 아니라 일본에게로 이전되었고 조선은 그렇게 피식민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청,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이해관계를 가진 주변의 어떤 국가도 조선관계 외교문제를 조선조정이 아닌 일본과 교섭해야 하는 것으로 되는 변화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70만명 가까이가 죽고 다친 일본에게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일본과 충돌하여 자기들도 그 만큼의 희생을 각오하여야 했던 까닭이었을까요?

 

1989년 최초발견 당시 의사도 능력도 없는 것으로 취급되던 북핵, 30년이 경과하여 완성이 분명해지자 이제는 방어용일뿐이므로 위협이라 할 수 없다고 쉴드쳐지는 북핵, 그 북핵 너머에 ‘6.25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에 조선을 도운)의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시진핑의 중국몽이 있습니다.

 

이 중국몽이 한반도 남쪽 10만㎢의 좁은 땅, 오천만의 거주민에게 드리운 미래를 제대로 전망하고 대비하자면 우리가 보아야 할 역사는 <해방전후사>가 아니라 <조선의 잃어버린 50년>이 아닐까요?

 

이 역사를 제대로 살피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인식을 확립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숙제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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