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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원재
-검찰총장 사퇴 이후 국민의힘에 입당, 문재인 정권이라는 풍차 갖다박는 모습 보여줬어야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풍차 향해 돌진했던 돈키호테, 투사의 모습 보여달라
-정치철학적으로 왜곡된 좌우 진영에서 자유로운 윤석열이 ‘자유’의 깃발로 진영 재편해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휘청인다. 캠프 내 인사에서 노이즈가 나오는가 하면, 소셜미디어 홍보 전략이 지적받기도 하고, 여론조사를 두고 이재명 경기지사와 엎치락뒤치락 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며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모멘텀을 잃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좌파진영에서 마타도어에 화력을 모으는 가운데, 정권 교체를 절실하게 갈망하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 모든 상황이 걱정이다. 몇달 전만 해도 확실한 승리 패로 보였던 윤석열. 그런데 최근 모습은 다수의 범야권 지지자들에게 회의감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뭐가 문제일까?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는 캐릭터 설정으로 보인다. PR에 방향성이 없다. 이 문제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최근에 만든 페이스북 계정이다. 젊은층에 호소하려는 듯 B급 감성을 담아 만들었는데, 그 의도가 불분명하다.
편안한 일상복을 입고 애완견과 찍은 프로필 사진이나, 엉성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커버 사진. SNS가 처음이라 서툴지만 배워가며 다가가겠다는 문구, ‘애처가’, ‘토리아빠 나비집사’, ‘국민 마당쇠’, ‘엉덩이 탐정 닮았다고 함’이라 적혀 있는 직업소개란. “그 석열이 “형” 맞습니다 / 국민 모두가 “흥”이 날 때까지”라는 소개글까지. 이 페이스북 계정을 보며 제일 먼저 받은 인상은 유감스럽게도 ‘조기 은퇴해 집에서 노는 아저씨’라는 인상이었다.
대중들에게 인식된 이미지, 대중들이 지지한 이미지는 이런 게 아니다. 단정한 양복 위에 얹어진 부리부리한 눈매. 여느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무뚝뚝한 그는 필요한 말만 하며, 고집과 소신을 밀어붙여왔다. 그런 강단있는 검사의 모습이 바로 윤석열의 이미지다.
좌우 정권을 막론하고 권력에 저항해온 투사로서의 윤석열은 마치 돈키호테와 같은 ‘언더독’이지만, 동시에 역전극의 기대감을 안겨주는 믿음직한 언더독이었다. 문재인 정권의 독재적 검찰 탄압. 갖가지 위협과 압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조직. 이런 조직을 이끌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그 결기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래서 윤석열은 검찰총장 사퇴 이후 과감한 추진력을 보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시 여전히 불안해보이던 국민의힘에 곧바로 입당해서 힘없는 야당을 이끌고 문재인 정권이라는 풍차를 갖다박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보수 세력의 이미지 문제 때문인듯 계속 거리를 뒀고,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지났다.
검찰총장 사퇴가 3월 4일이었다. 한 달 후 국민의힘은 4월 3일 재보궐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며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도 바뀌었다. 적폐세력이라는 프레임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중도 무당층으로부터 호감이 커졌다. 그렇게 이미지는 빠른 속도로 개선되었다.
윤석열이라는 캐릭터는 자유주의적 접근을 해낼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정치판에서 대중이 인식하는 이미지의 속성이라는 게 그렇다. 승리한 야권은 합리적이고 건강한 대안으로 보이고, 패배한 여권은 부패한 이들이다. 그리고 다시 2개월 가량이 지나 6월 11일 전당대회가 치러졌다. 재보궐 때 주목받은 2030여론(사실 이 기류는 이미 지난 총선 때부터 관측되던 것이었고 분석을 한 바 있다)은 전당대회의 주인공이 되었고, 국민의힘은 젊음과 개혁이라는 이미지를 가져가며 재탄생했다.
그리고 윤석열은 이 흐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는 국민의힘이 정권교체 세력이자 대안세력으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가는 3개월 동안 외곽에서 방관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우물쭈물한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그 결과, 야권 지지자들 눈에는 윤석열의 대안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중도 무당층은 스포트라이트를 옮겼다. 정권에 대한 항거의 중심이 윤석열에서 국민의힘-이준석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윤석열은 이제 그냥 ‘정치인’이 되어버렸다. 기존 정치인과 완전히 다른 매커니즘으로 움직이던 ‘검사’ 윤석열. 기성 좌우 정치인 모두에게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반골. 그랬던 인물이 검찰총장 사퇴 이후 평범한 정치인이 되며 기존 정치 문법 속에 묻혀버리는 인상이다. 지지 동력이 빠지는 게 당연하다.
윤석열이 다시 승기를 잡아가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정권을 수사한다는 이유만으로 핍박받던 정의로운 검사들을 이끌고서 풍차를 향해 돌진했던 돈키호테. 그 투사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둘러 세력을 이끌고 통쾌하게 갖다박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윤석열이 서둘러 입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당 문제와 더불어 서둘러 해결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는 ‘정치인’으로서 내세울 ‘깃발’이다. 윤석열의 최근 행보를 살펴보면 ‘반문’이라는 인상은 느껴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와 철학을 표방하는지 알 수 없다. 대중이 기대하는 건 식상하고 뻔한 안보 행보 같은 게 아니라(이건 기본기다) 분명한 ‘색깔’이다.
개인적으로 윤석열이 자유주의와 탈국가주의를 외칠 거라 생각했었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잠룡 중 정치 진영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한국의 좌파 진영과 우파 진영의 문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아젠다를 세팅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그가 자유주의에 기반한 탈국가주의를 외칠 거라 생각했다. 선진 자유민주 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담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울려퍼지지 않은 목소리다.
한국에는 아직 ‘작은 정부’라는 개념이 자리잡은 적이 없다. 좌파건 우파건, 주류 정치 세력들은 죄다 국가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좌파 진영이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우파 진영이다. 국가주도의 박정희 주의를 우파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다. 엄연한 선진국이 되어 역동적인 시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시장은 언제나 국가에 의해 보살펴져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 위기의 근본적 문제는 시대정신의 부재라는 말을 해왔다. 산업화 민주화 이후 새로운 시대정신이 나오지 않은 거다. 산업화 세력은 가난과 싸웠고,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을 상대로 투쟁했다. 전자는 경제적 성취를 이뤘고, 후자는 민주적 성취를 이뤘다. 문제는 새로운 대안세력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득권을 잡은 민주화 세력은 여전히 언더도그마 등에 호소하며 자신들의 시대정신을 공고히 하고 있고, 정치 신세대들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룰 속에서 소모될 뿐, 새로운 철학을 창출해내지 못했다. 나아가 새로운 대안세력의 부재로 민주화 세력이 권력은 물론, 정의와 도덕까지 독점해가며 나라를 망쳐왔다. 한편 우파 진영은 그저 산업화 시대의 영광 속에 묻혀 새로운 철학과 가치를 개발해내지 못했다.
우파진영이 기껏해야 노선에 변화를 준 건 2012년 대선 당시였다. 국가가 전 국민 생애주기별로 복지를 해줘야 한다는 강령을 내세우며 노골적인 좌클릭을 했다. 이는 국가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가 아니라, 그저 콘크리트 지지층에 더불어 중도를 잡아 쉽게 승리하겠다는 기회주의적 선거공학이었을 뿐이다. 최근까지도 이런 행보들이 계속되어오며 좌나 우나 국가중심 포퓰리즘에 호소하고 있다. 그렇게 정부는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져만 간다.
젠더 담론부터 LH 사태에 이르기까지. 재보궐 선거를 뒤흔들었던 이슈들은 ‘큰 정부’의 문제와 맞닿아있는 구석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작은 정부’를 이야기하며,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 때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계약의 관계로 말이다.
이런 자유주의적 접근은 우파 주류 정치 세력의 외면과 동력 부족으로 인해 늘 실패해왔지만, 나는 윤석열이라는 캐릭터가 이를 해낼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가 감명깊게 읽었다는 책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라는 말을 듣고 내심 큰 기대를 했다.
2030 여론의 지지는 물론, 추락해가고 있는 국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비전이 산업화, 민주화 이후 자유화, 내지는 개인화라는 이름의 시대정신으로 등장하기를 바랐다. 정치철학적으로 왜곡된 현재 대한민국의 좌우 진영으로부터 자유로운 윤석열이, 새로운 깃발을 내걸고 좌우 진영을 재편했으면 하는 기대를 한 거다.
제20대 대통령선거는 내년 3월 9일에 치러진다. 아직 8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에서 8개월이라는 시간은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긴 시간이다. 현재 범야권의 대권 후보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윤석열이지만, 당장 몇 개월 후에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정권교체만 이룰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다는 심정이고, 특히 이재명만 막을 수 있다면 어떤 차악이라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다만, 누구든 현재 족벌주의 중심으로 왜곡된 좌우 정치 진영을 재편해줬으면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택할 자유’를 이야기한 윤석열의 행보에 내심 기대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