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의 ‘전향’의 의미와 진보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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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환

 

-권위 있는 이승만 연구자들도 조봉암을 죽인 것은 이승만 말년의 실정 중에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지원 받으며 전개한 독립운동과, 해방 후 전향하여 건국에 참여한 죽산

진보당 재판이나 5·18 관련한 김일성의 일방적 주장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건 지성인 태도 아냐

 

 

진보당 사건의 역사적 재평가
-경북대아시아연구소가 진행하는 학술대회 기조발제

 

먼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런 자리를 만든 경북대아시아연구소와 한국구술사학회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김용기, 곽정근, 이모세 3대에 걸친 회장님들을 모시고 죽산기념사업회에 참여한 입장에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 분 한 분, 1950년대의 기억을 가진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오늘, 이제라도 소중한 구술을 받아서 역사의 퍼즐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보당 사건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잊혀진 사건입니다. 그것은 그를 ‘사법살인’한 자유당이나 이를 방조한 당시 민주당이 지금의 여야 양대 정당의 뿌리로 받아들여지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들의 조상의 부끄러운 행동이 상기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애써 무관심해 온 것이 아닐까요?

 

 

권위 있는 이승만 연구자들도 조봉암을 죽인 것은 이승만의 말년의 실정(失政) 중에 하나로 인정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이제 진보당 사건은 재평가될 수 있는 시기에 왔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화제에 오르더라도 현재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 평가가 너무 크게 차이가 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물론 다른 역사적 사건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그 편차가 매우 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고 있는 사실이 매우 달라서 인식을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동의 기반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당 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제(未濟)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다루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의 재심 판결이 중요한 하나의 준거를 제시하였습니다. 특히 이승만을 옹호하는 입장에 선 분들, 유영익과 같은 권위 있는 이승만 연구자들도 조봉암을 죽인 것은 이승만의 말년의 실정(失政) 중에 하나로 인정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이제 진보당 사건은 재평가될 수 있는 시기에 왔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학자 여러분의 노력과 관심이 지속되어 큰 학문적 성취가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냉정한 객관성을 추구하는 학자 여러분이 듣기에 사뭇 다른 분위기의 말이라도 양해를 해주신다면 몇 마디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젊은 시절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개한 독립운동과 해방 후 전향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죽산의 전 인생행로에 대하여, 그 굴곡진 전 과정에 저는 모두 깊이 공감하는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편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 감안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조봉암 선생약력

– 1898년 강화 출생
– 1919년 3.1운동으로1년 복역. 동경중앙대학에서 1년 정치학 공부. 비밀결사 ‘흑도회’에 가담하여 항일운동
– 1925년 조선공산당 참여
– 1928년 ML당 활동으로 검거. 7년 복역. 출옥 후 인천에서 저항운동하다 검거
– 1945년 광복되어 석방
– 1946년 공산당 탈당
– 1948년 제헌국회의원 당선. 초대 농림부장관 지냄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재선. 국회부의장 선출
–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 출마, 차점으로 낙선
– 1956년 제3대 대통령후보 출마. 216만여표 획득. 낙선
–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
– 1958년 1월 13일 국보법 위반으로 체포. 진보당 7명과 함께 간첩 혐의로 구속
– 1959년 7월 30일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정권에 의해 사형

 

 

제일 먼저, 조봉암의 ‘전향’의 의미를 먼저 세계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로부터 영미(英美)의 진보, 영국 노동당의 페이비안 사회주의와 미국 민주당의 진보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전향 이후, 진보당 사건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헌영의 <8월 테제>를 읽어보면, 일제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왜 그토록 많이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했는지 그 이유의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8월 테제>의 내용은 이영, 최익한 등 장안파의 1단계 혁명론을 비판하면서 2단계 혁명론을 설파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금(1945년) 조선의 현실은 바로 사회주의혁명을 시도할 때가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할 때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논리 정연하고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으며, 객관적인 역사 발전 단계에 따라 지식 청년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또 항상 논의를 전개함에 주관적 의지보다는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을 중시하고, 근로인민 특히 소작농과 노동자의 편에서 바라볼 것을 강조하며 대중투쟁을 역사 발전의 중심에 둔, 근로대중과 결합하는 실천을 중시하는 이론은 당대 숱한 청년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소작료를 30%로 낮추라(나아가 농지개혁을 하자),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 보통 교육을 실시하라, 남녀평등을 실현하자, 일제가 남기고 간 산업 시설을 국유화하자, 국가 기간산업을 국공유화하자는 등의 제안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습니다.

이런 <8월 테제>의 논의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미 독립운동 시기에 널리 퍼져 있었고, 조선의 청년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사상과 이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8월 테제>를 통해서 1920년대, 30년대의 조선 청년들이 왜 그렇게 많이 친소 공산주의 노선으로 기울어졌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닌이 제공한 물질적 도움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지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8월 테제>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해방이 되자마자 몇 달 지나지 않아서 그 필자인 박헌영을 비롯하여 조선공산당, 또는 남조선로동당의 주류가 오히려 배신자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이후 행동은 <8월 테제>를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소련과 스탈린의 지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미 소련군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냉혹한 현실 정치가 스탈린의 전략구상은 짜여 있었고, 순진한 조선 공산당 당원들이 이를 짐작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미사여구와 정치적 수사들만이 조선 공산당 당원들의 귀에 들어왔을 따름입니다.

 

스탈린의 미사여구가 아닌 실제 행동에 대한 종합 브리핑이 1946년 5월에 조봉암에게, 그리고 몇 달 후에 신익희에게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제공되었다는 것이 저의 가설입니다.

 

1946년 5월, 분명하지 않은 빌미로 조봉암을 잡아들여서 일주일 동안이나 조사, 대화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북한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2월에 이미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었다는 사실이 그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저는 추리합니다.

미국 정보기관은 조봉암에게 소련이 북한에 들어와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곧장 밀어붙인 정책들, 그 배경과 세계사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설명하였을 것이고, 이들 고급 정보를 전달 받은 조봉암은 깊은 사색 끝에 그 사상의 감옥으로부터 탈출 또는 ‘전향’을 결심하였다고 봅니다. 그것은 흡사 우크라이나의 대기근과 스탈린의 숙청의 소식을 전해 듣고 조지 오웰이 소설 <동물농장>을 쓰기로 결심한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 공산당이 <8월 테제>에 충실했던 것은 인민공화국의 각원(閣員)의 명단을 발표한 그 날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민공화국 구성안을 보십시오. 바로 지금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라는 이론에 충실한 정부 구성이 아닙니까? 물론 미군정이 이를 부인하지만 그렇다고 소련이 이를 존중한 것도 아닙니다.

소련은 이미 모든 각본을 짜고 김일성을 투입하여 곧장 북한에다 친소 정권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45년 9월에 원산으로 들어온 김일성이 권력을 쥔 것은 1946년 2월이니 몇 달 걸렸습니까? 5개월도 걸리지 않았고, 당시 만 34살의 김일성 이름을 딴 김일성종합대학이 문을 연 것은 1946년 10월 1일입니다.

이렇게 밀어붙이는 소련의 지시에 충실하자면 박헌영은 바로 자신이 쓴 <8월 테제>를 잊어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조봉암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또 그 조항들을 실현한 대한민국의 실정(實情)을 보시면, <8월 테제>의 요구가 거의 실현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8월 테제>를 배반한 것은 조봉암이 아니라 박헌영이라고 생각합니다.

 

1946년 6월에 이른바 전향을 하고 난 후의 조봉암의 행적과 태도를 보십시오. 그의 어떤 모습에서 배신자의 비겁함과 좌고우면(左顧右眄)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는 당당하게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인 좌파의 길을 개척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아마 미군정 당국은 그에게 미국의 점령 정책을 거듭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공산당과 사회당의 합법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있다고, 그것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라고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하지가 소련의 지령대로 움직이지 않는 좌익 정당을 만들어보지 않겠는가를 물었을 때, 조봉암은 그러면 자금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지와 만난 조봉암이 신문 창간 등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공산당의 비주류를 모으려는, 소련에 독립적인 좌파 정당을 만들려는 조봉암의 노력은 끝내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미군정이 후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외롭고 가난한 그가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몇 달 후에는 신익희도 한독당을 탈당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개시합니다. 신익희 역시 미군정이 후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익희와 조봉암의 경우에는 미군정이 계속 도와주었다고 봅니다. 당시 미군정과 미국무부나 정보기관의 한국 정책 파트에는 ‘루스벨트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진보적인 청년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조봉암이 배신자로 보이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또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는 공산당이나 나치 전체주의자들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인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수천만 인류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파시즘, 나치즘, 군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불타는 이상(理想)을 가진 청년들이 한국에서 만난 조봉암과 대화를 하였습니다.그들 중에는 법률 전문가도 있었고, 그들의 시각으로 5•10 총선을 위한 선거법과 제헌헌법을 비판한 것이 아닐까요? 조봉암의 연설에는 왠지 그들과 나눈 대화가 느껴집니다.

 

그들 이상주의자들은 조봉암에 매력을 느끼고 그를 지원하여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인 진보 정치 세력을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제헌국회에서 결국 서면으로 제출된 조봉암의 첫 토론 같은 경우에는, 어떤 국제적인 배후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나 미군정의 법률고문들의 도움이 없었을까요?

 

생사를 넘나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영미(英美)의 진보 인사들과 조봉암은 더욱 가까워지고 전우(戰友)가 되었다고 봅니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3일 만에 군대를 파견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유엔군의 깃발 아래 16개 나라 군대를 파병하여 대한민국을 구한 것은 미국의 트루먼 민주당 정부였고, 이에 협력한 것은 영국의 애틀리 노동당 정부였습니다. 그런 만큼 전쟁 중에 한국에는 영미의 진보 인사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봅니다.

1954년 전쟁이 끝난 직후에 쓰신 <우리의 당면 과업>을 읽어보면 죽산은 영국노동당 이야기를 거듭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꿈이 있는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에도 영국노동당 같은 근로대중에 기반한 진보정당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튼튼히 할 수 있고, 반공(反共)•승공(勝共)할 수 있다고 거듭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로 저는 1950년대의 정세와 분위기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살펴보면서 진보당 사건을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1950년대 중반은 아직 ‘정전협정 이후에 정치 회담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네바 회담에 대한 기대가 살아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신익희가 뉴델리에서 북한에서 온 조소앙을 만났다는 설(說)로 시끄러운 일도 있었고, 조봉암은 저서 <우리의 당면 과업>에서 제네바 회담에 대한 큰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돌출적인 것이라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견제하는 국제적인 흐름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휴전만 한 채로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불안정한 한반도에서 혹시 이승만의 고집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다시 전쟁이 터지는 것을 걱정하는 국제적인 흐름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조봉암의 평화통일론도 그 흐름과 맥이 닿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의 과정과 결과가 보여주듯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와 건국대통령으로서 그가 누렸던 권위가 많이 추락하였습니다. 이미 국민들은 그가 그만두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대체할 만한 보수 인사는 신익희 뿐인데 그마저 유세 중에 사망하자 조봉암의 대중적 인기는 여·야당 모두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사실 문제는 단일 야당운동에 그를 배제한 데서 발생하였습니다. 인촌 김성수나 서상일 등의 주장대로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함께 하겠다”는 죽산을 단일 야당운동에 받아들였더라면 그가 독자 출마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신에 야당 민주당이 영국노동당이나 미국 민주당에 보다 가까운 진보정당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빈농과 노동자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추구하는 야당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한민당 사람들, 지주들, 일제 시대 관료 출신들의 시야가 너무 좁았고, 그들의 콤플렉스가 심했고,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조봉암을 너무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되어 조봉암도 죽고, 아부꾼 이기붕은 3·15 부정 선거로 일가족이 자살하고, 이승만은 팔십 평생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950년 대 후반 한국은 아직 독립국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을 미국의 원조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정도 깊이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 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장면이나 (서거하기 전의) 신익희나 조봉암 등이 모두 미국이 후원하는 이승만의 대안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봉암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미군 장교가 한 사람 배정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마 당시의 치안도 불안한 가운데 경호원 겸 정보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따라서 조봉암과 진보당에 관련된 모든 일도 미국이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이승만이나 이기붕의 입장에서 신경이 쓰이는 부분도 바로 조봉암과 미국의 어떤 대한(對韓) 정책 라인과의 이렇게 밀착된 관계가 아니었을까요? 저는 실로 발굴이 필요한 부분은 미국 대사관, 미국 국무부, 미국 정보기관의 문서라고 봅니다. 앞으로 학자 여러분의 연구에 기대를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조봉암과 북한의 관계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남한에서 있었던 모든 반정부 운동, 민주화운동 등을 모두 김일성 주석의 교시(敎示)를 받고, 지원을 받아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 저는 광주에 가서 5·18 기념 강연을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 군대가 파견되어 왔고, 북한 간첩이 기획하여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믿는 사람들이 보수진영에는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공식 문서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교과서 등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남조선 인민이 떨쳐 일어난 반미 자주화 투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한의 극우파 일각에서 이를 근거로 하여 5·18에 북한 간첩과 군대가 왔다고 주장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꼭 같은 일이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진태 의원이 대중 강연에서 대법원 재심 판결은 다만 수사 과정에서 절차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한 것이고, 북한의 자금 지원은 사실이고, 북한이 조봉암과 진보당을 지원하였으며, 고로 1959년의 진보당 재판은 실제로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책 한 권을 들고 나와서 흔들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책은 북한에서 출간된 책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4•19 혁명 이후 북한은 연방제 통일방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1980년에는 이를 구체화하여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만들자고 국호(國號)까지 제안하여 이를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방제 통일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쪽이,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는 중요합니다.

좁은 한반도에 불안정하게 두 개의 나라가 있는 이런 정황 속에서 “통일의 주도권을 우리(북한)가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김일성에게 대외적으로, 외교적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소련이나 중국 등 자신들의 우방국에게도 이를 설명하는 것이 당연한데, 연방제 통일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남한에 우리 편이 있다, 우리가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북한은 1960년대 통일혁명당을 비롯하여 계속 남한에 친북 세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고, 또 과거에 남한에 있었던 운동이나 세력을 모두 자신들 편으로,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선전해온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법살 당한 조봉암이야말로 거기에 딱 맞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마자 “변절자 조봉암을 죽이라!”고 벽보를 써 붙였던 북한이 평양의 애국열사릉인가 어딘가에 조봉암의 가묘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일방적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학자와 지성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학문의 방법론에 엄격한 학자 여러분을 믿습니다. 간혹 황색 저널리즘이 여러분을 유혹하더라도 학자의 양심으로 대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학술 대회에서 많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전현수 교수님을 비롯하여, 이 자리를 만들기까지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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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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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봉암2021.6.30 AM 08:35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002608100003
    제 정신인가?이 판국에 조봉암을 빨고앉았네. 공부나 좀하고 쓰던지! 제3의길도 프락치가 있나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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