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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석희
-그들은 무협지의 비밀 결사가 무림 깊숙한 곳에서 비전의 무공을 닦듯이 공부하고 책을 썼다
-실질 갖추지 못했기에 더욱 명분을 내려놓지 못했고, 종교처럼 실체가 없는 허업에 매달렸다
-세속적 기준으로 큰 인물이 되기 힘들다고 생각한 나는 초등학생들 앞에 큰인물 되기로 했다

고조할아버지는 단발령에 분노했고 최익현의 격문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은 최익현.
나의 할아버지. 이름은 박성원. 1928년 생, 삼척 사람이다. 유소년기를 일제시대에 보냈고, 고등교육을 해방동란의 시기에 마쳤다. 양반 가문으로, 시골 궁벽한 향교에 은둔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문의 당색은 남인이다. 경상도 지방에서 근근히 기득권을 유지하며 양반으로서의 자의식에 연연했다. 조선은 숙종 이래 서울에서 살지 않는 이에게 웬만해서는 벼슬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글 하는 이의 자부심과 토지를 기반으로 한 향촌에서의 지배력을 계승하며 근근히 정체성을 유지했다.
봉건 영주가 아닌 관료 지망생으로서의 양반은 벼슬 없이 정체성을 유지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협지의 비밀 결사가 무림 깊숙한 곳에서 비전의 무공을 닦듯이 공부하고 책을 썼다. 성리학적 원칙론에 바탕을 둔 근왕의 이념으로, 경상도 땅을 돌아보지 않는 임금을 짝사랑하며 기약 없는 연군지정을 바쳤다. 조상 중 몇몇 이들은 벼슬을 했다. 그러나 나의 직계는 경상도에 있었다.
지방에 근거를 두고 명분과 학식을 갖추어 중앙에 진출해 나라를 바로잡은 사림 선배들을 본받아 왕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생각하는 영조를 비판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했을 때는 임오년의 의리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했다.
나라가 위급할 때는 의병을 일으켰고, 임금이 위험할 때는 근왕의 군대를 일으켰으며, 세속의 권력에 휘둘려 홍진을 뒤집어 쓴 조정이 돌보지 않는 임금의 의리를 바로잡으려 했다. 실질을 갖추지 못했기에 더더욱 명분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러나 경종 정통론과 사도세자 정통론의 연결처럼 정합성이 떨어지는 것이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종교처럼 실체가 없었다. 많은 조상들이 허업에 생을 걸었다. 그건 말과 글로 쌓은 공허한 성채였다.
고조할아버지는 위정척사 선비였다. 양물을 들여오는 것은 기자 이래 이어온 나라와 문명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영남 선비들의 만인소에 서명했다. 단발령에 분노했고 최익현의 격문에 이름을 올렸다. 을사년의 늑약과 경술년의 정변으로 나라는 없어졌다. 무너진 나라와의 의리를 위해 망국의 제사를 지내고 엎드려 울며 나라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동생과 함께 6.25에 참전했다. 형을 존경했다. 큰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다. 돈을 벌려 하지 않았고, 해방 이후 가난한 조국으로 돌아와 환자들을 살렸다. 공산당에 협력하지 않아 죽었다. 반동의 오명을 썼다. 자식도 없이 일본인 처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두 동생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대했다.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장교가 될 생각이 없었으나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장교가 됐다.
할아버지는 광산 쪽을 공부해서 지도를 볼 줄 알았고 약간의 영어가 됐다. 작은 할아버지는 방첩대로 빠졌다. 할아버지는 백 야전사령부에서 대대장을 지냈고, 현리 전투에서는 작전장교였다. 과문해서 군단 작전장교인지, 사단 작전장교인지는 모르겠다.
군단 전체가 허물어지는 혼란과 전멸의 지옥 속에서, 김종오 장군의 지휘로 살아남아 귀환했다. 할아버지는 백선엽 장군과 김종오 장군 둘을 지휘관으로 만난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현리 전투의 참상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았다고 한다.
시대를 피하지 못하고 시대에 정면으로 맞섰다.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초식동물 떼처럼 살 곳을 찾는 백성들을 뒤로 하고, 파괴와 학살을 일삼는 적들을 맞아 싸웠다.
전쟁 중 김영삼 정권 시절 정무수석을 지냈던 이원종의 부친을 살려줬다고 한다. 이후 시대는 약동하고 뒤틀렸고, 우리 가문과 이원종 씨의 가문은 명암을 달리 했다. 할아버지의 고지식함은 곧 다가올 새 시대에 맞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군을 떠났지만, 한동안 ‘박 대령’이라 불렸다.
1990년 12월 11일 내가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하동군 악양면 입석리의 유래가 된 큰 돌을 생각하며 큰 인물이 돼라고 석희라 이름을 지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평사리의 지척으로 가문의 토대가 된 땅이었다. 할아버지는 장손이 태어났다 좋아했다. 우리 집을 좋아했다. 그리고 세상은 더 빠르게 지나갔다. 아버지는 자신이 부친만 못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러하다. 세속적 기준으로 큰 인물이 되기 힘들다고 생각한 나는 초등학교 아이들 앞에 큰 인물이 되기로 했다.
지금은 2017년 12월. 마산초등학교를 나서고 있다. 이것은 내멋대로 쓴 작은 약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