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의 이해#1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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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광제

 

-논리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계의 정체, 세계의 비밀을 달관한 사람

-귀납법, 17~18세기에 영국 경험론 철학의 학문 방법론으로 강조. 근대 자연과학의 소산

-일상어 추론으로는 불가능한 논리적사고 해결하는 기호논리(symbolic logic) 새로 등장

 

 

논리학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는 대부분 “너의 말이나 글은 논리적이 아니다”라는 지적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지적은 통상 치명적이다. 특정한 일을 다루기 전에 먼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은 논리라는 것이 모든 분야의 문제해결에 공동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글은 그 표현방식이 무한히 다채롭고 다양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논리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말이 논리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논리적 규칙을 어기거나 또는 무시함으로써 더욱 생생한 표현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시되고 어겨지는 경우에도, 무시되고 어겨진 논리는 반드시 있다. 그러면 그 논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논리가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대상 쪽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유주관 쪽에 있는 것일까? 주관 쪽에 있다면 우리의 말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말하기 전 우리의 생각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대상에도 주관에도 있지 않고, 2+3=5 같은 수학명제처럼 순수한 관념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에 대해 실증적 해답을 준 사람은 아직 없다. 만약 논리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계의 정체, 세계의 비밀을 달관한 사람이다. 그런 주장은 하나의 독단론에 불과하다.

 

논리학에서는 그런 독단론들을 다루지 않는다. 논리학은 이미 존재하는 논리 자체의 규명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세계법칙, 사고법칙, 언어법칙도 아니면서, 논리학은 어떤 분야의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거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논리 자체의 규명이라는 선명한 영역을 가진다.

 

그렇다고 논리학이 특별히 난해한 대상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대화하는 모습.

 

우리의 지식은 어떤 분야의 것이든 논증의 연결이다. 그 논증의 내용이 아닌 연결형식을 다루는 것이 논리학이다. 따라서 논리는 현대문명에서 인정하고 있는 모든 학문에 통용될 수 있는 공통의 형식적 원리이다. 모든 학문의 공동의 형식이 논리라면 그것은 바로 현대문명의 바탕을 형식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와 문명이 발전하고 변천하는 데 따라 논리도 당연히 변천한다. 논리학도 흔히 거의 모든 학문이 그런 것처럼 서양의 학문이며 서양학문 중에서도 서양문명의 성격을 가장 잘 대표하는 학문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해서 소위 형식논리학(formal logic)이라고 불리우는 학문이 체계적으로 열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의 특징은 인간의 추리를 연역추리와 귀납추리로 나누고 특히 연역추리에 힘을 기울여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 해명한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창시된 논리학은 중세를 거쳐 근대 경험적 자연과학이 대두하기까지 서양문명을 지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서양문명을 지배했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이 서양문명을 지배했었다는 말과 동치이다.

 

귀납추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도 적절히 다루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귀납법이 학문의 적극적 방법으로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7~18세기의 영국에서였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이 귀납추리 영역에 독자적 기여를 했다.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J.S. Mill)에 와서 경험적 귀납법은 논리적으로 법칙화되기에 이르렸다. 귀납추리는 근대 자연과학의 소산이며 과학적 근대 문명과 논리학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입증한 것이었다.

 

근래에 와서 일상어를 기호화하여 일상어가 가지는 애매성과 다의성을 없애는 새 분야가 열렸다. 말의 기호화는 말이 가지는 결함을 제거하고 논리적 사고에 편의와 간편성을 주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논리계산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즉, 일상어로 된 추론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하고 포괄적인 대상에 대한 논리적 사고를 기호에 의한 논리계산으로 해낼 수 있는 기호논리(symbolic logic)가 20세기에 와서 새로이 등장했다. 이로써 논리적 사고는 이미 제한된 인간의 두뇌를 떠나서 기계적 조작에 맡겨질 수 있게 되었다. 20 세기에 와서 논리학의 이러한 발달은 소위 컴퓨터를 낳게 하였고, 이로써 논리학이 현대문명의 소산임이 또 한번 증명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컴퓨터에게 대신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써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 의미의 논리학은 결코 사멸된 것이 아니다.

 

[제3의길]에 연재될 논리학은 필자가 교육현장에서 강의하는 노트의 내용들이다. 이 노트는 선재하신 분들과 문서들에 근거하였으며, 우둔한 필자의 독창은 눈꼽만치도 없다. [제3의길]에 연재하는 글의 말미에는 가급적 내용 이해를 돕는 문제와 해답을 제시하겠다. 앞으로 논리학을 실감나게 체험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란다. 우둔한 시대일수록 명쾌하게 살자.

 

•필자 소개
이승만학당 이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고문, 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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