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절반의 여성이 성노리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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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성회

 

-세종의 노비 종모법은 전체 인구 5~10%였던 노비(노예)를 전체 인구 40~50%에 달하게 해

-사노비던 관노비던 낮엔 허드렛일, 밤엔 성노리개였던 여성노비. 양민과 결혼해도 자식은 노예

-일본군 위안부에 분노한다면, 조선시대 노예제와 지금 북한에서의 반인권 참상에도 분노하자

 

 

1. 선택적인 분노와 정략적인 분노가 아니려면
세종 때 만들어진 노비 종모법은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노비면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 제도에 의해, 전체 인구 5~10%밖에 안되던 노비(노예)가 급속히 늘어나 전체 인구의 40~50%에 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인구 절반이 노비였던 것이다.

그중 가장 비참한 것이 여성 노비였다. 여성 노비들 중에는 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밤 시중도 드는, 한마디로 성노리개이면서 노예노동을 하는 관비도 많았고, 양반이 드나드는 일반 주막에서 허드렛일과 성노예를 겸하는 기생도 흔했다.

 

 

1890년대까지 노예제도를 유지했던 조선은 전체인구 40~50%가 노예였다. 프랑스 대혁명기 이전에 흑인 노예제도까지 폐지된 서구유럽과 비교해도, 뒤늦은 링컨의 노예해방과 비교해도 100년 가량 뒤늦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일반 여성 노비들의 경우도 결혼하기 전에는 낮에 집안 허드렛일을 하고, 밤에는 양반집 주인이나 그 아들의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결혼은 노비를 양산하기 위해 주인이 정해주는 대로, 다른 외거 노비나 일반 양민과 결혼해야만 했다.

외거 노비나 일반 양민과 결혼하면 좋지 않냐고? 좋은 것 같지만, 실제는 그녀가 낳은 자녀는 원래 주인의 노비가 되었다. 심지어, 원래 주인이 노비가 결혼해 살림하는 곳으로 찾아와 남편을 내쫓고 잠자리를 갖기 일쑤였다. 즉, 결혼하고서도 성노리개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와 같은 일 때문에 벌어진 사건 사고들이 수없이 많다. 또, 외지나 변방에 근무하는 군관에게도 허드렛일과 잠자리를 해주는 변방 관기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주변 마을 양반들이 거느린 노비 중에서 선발되어 배속되었다. 선발된 관기 중에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성 노비도 많았다.

심지어, 정약용 같이 중앙에서 힘 깨나 쓰던 관료가 귀양살이를 할 때는 관에서 귀양살이를 도우며 허드렛일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성 노비를 배속하기도 했다. 정약용 역시 그 여인 사이에서 애까지 낳았으나, 귀양살이가 풀려난 뒤그녀가 서울까지 찾아오고 매년 선물 꾸러미를 보냈음에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고 싶은가? 위안부 제도를 운영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운가? 반인권적인 행태를 미워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분노의 절반만큼이라도,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는 반인권의 참상에도 분노하자. 조선시대 벌어진 노예제도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반성하고 분노하자. 그렇지 않다면 선택적인 분노가 정략적인 분노를 하는 것에 무엇이 다르겠는가!

 

 

2. 1890년대까지 피붙이를 노예로 삼던 조선사회

 조선 노비는 로마 노예보다 훨씬 비참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조선시대 노비는 세종 때 만들어진 노비 종모법, 일천즉천 제도에 의해 전체 인구의 40~50%까지 늘어난다. 양반이 20% 정도, 중인과 상인이 5~10% 정도, 양민 20~30% 내외가 조선사회 인구 구성이었다.

 

이토록 양인이 허약하다 보니, 조선의 국방력이 형편없을 수밖에 없었다. 즉, 양반이나 노비는 군역에서 제외되니 결국 20~30%되는 양인이 조선 국방력을 떠받치는 셈이었다. 그나마 양인만으로 군역을 채우기 어렵다보니, 면천이라는 특혜로 노비들을 동원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같은 종족을 대상으로 하는 노예제도로, 전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제도였다. 로마 등의 고대 국가에서도 타 종족을 정복한 뒤 그 종족을 노예로 부렸으면 부렸지, 자기 종족을 가축의 일종인 노예로 부리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에 조선의 노비는 로마 또는 다른 어떤 나라의 노예보다 훨씬 비천한 존재였다.

 

몽골의 경우 노예는 자신의 대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일정한 노동력을 제공하면 얼마되지 않아 면천되어 일반인처럼 생활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도 향·부곡·소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고려시대까지는 그러했다.

 

로마의 경우는 노예가 주인 자식들의 과외 선생 노릇도 했고 학교의 교사가 되기도 했다. 집정관이나 황제 밑에서 서무 회계를 담당하는 실무진들은 노예 출신들이 많았다. 의사 등의 전문직 대부분은 노예출신들이었다. 심지어 노예출신 중에서 나중에 황제가 된 인물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노비는 그 같은 신분상승은 꿈을 꿀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주 특이한 경우로 반기문 총장의 선조인 경우인데, 주인에 의해 면천이 되어 과거급제를 해서 벼슬길에 올랐으나 노비였던 과거가 들어나 탄핵을 받을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왕의 총애로 간신히 탄핵은 면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노비제도는 그 비율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을 뿐 아니라, 어떤 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처지에서 벗어날 길이 사방팔방 막혀 있어 참으로 비참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극성기를 이룰 때 로마 인구의 30%정도가 노예였다는 것과 비교를 해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런 비참한 노예제도를 1890년대까지 유지했던 것이 조선이었다. 이미 프랑스 대혁명기 이전에 흑인 노예제도까지 폐지된 서구유럽과 비교해도, 뒤늦은 링컨의 노예해방과 비교해도 100년 가까이 뒤늦은 것이었다.

 

인구의 4~50%가 노비이고, 놀고 먹는 양반을 제외하면 겨우 20% 남짓의 사람들에 의해 지탱하던 조선사회. 그런 사회에서 누가 국방력을 담당하고, 근대화를 이룩할 힘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거기서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가 있었겠는가?

 

국뽕에 취해서, 다른 나라에게 삿대질하기 이전에 우리 역사의 꼬라지를 제대로 알고  분노하더라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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